키스 자렛 Keith Jarrett VS 윈튼 마살리스 Wynton Marsalis
재즈의 역사 속에서 라이벌을 꼽으라면 아마도 대략 이런 ‘대진표’가 만들어질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베니 굿맨’, ‘듀크 엘링턴-카운트 베이시’, ‘콜맨 호킨스-레스터 영’,
‘빌리 홀리데이-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즈 데이비스-존 콜트레인’ 등.....
하지만 이런 라이벌 구도는 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실제로 이들 사이에서 첨예한
음악적 대립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 사이에는 대립보다는 선의의 경쟁과 상호 존경이 우선했는데 엘링턴과 베이시,
호킨스와 영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반면에, 이들 대진표에 ‘키스 자렛-윈튼 마살리스’를 끼워 넣는다면 오히려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두 사람은 연배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고(자렛은 1945년생,
마살리스는 1961년생이다) 또 자렛은 피아니스트며 마살리스는 트럼피스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8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재즈 전체를 이끌어 온 대표적인 인물들이며
동시에 재즈란 음악의 본질과 향후의 방향을 놓고 오랜 논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진정한
라이벌이라 부를 만 하다.
뜻밖에도 두 라이벌에게는 음악적인 공통점이 발견된다. 나이 차에 걸맞게 두 사람은
정확히 15년의 간격을 두고 아트 블래키의 재즈 메신저스에서 활동했는데-
자렛은 1965년, 마살리스는 1980년 - 약관의 나이에 최고의 하드밥 밴드에서 활동했다는
경력 자체는 두 인물 모두의 천재성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부분이다.
아울러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재즈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클래식 연주에도 정통한 보기
드문 인물들로, 특히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 그리고 현대음악 부문에서 두 사람 모두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각 차이가 명확히 갈리는 지점은 바로 거장 마일즈 데이비스에
관해서다. 우선 마일즈 데이비스에 관한 윈튼 마살리스의 감정은 일종의 ‘애증’이라
할 수 있는데, 윈튼이 자신의 이름을 앨범 타이틀로 한 첫 음반(콜럼비아, 81년)을
발표했을 때 그 음악적인 모델은 분명히 60년대 중반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이었다.
자유분방한 리듬파트를 배경으로 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쉴 새 없이 벌이는 즉흥적인
상호작용은 바로 마일즈로부터 윈튼에게 이어진 것이며 윈튼 마살리스의 이러한
작업은 60년대 마일즈의 음악을 오늘날 포스트 밥의 직접적인 아버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튼은 데뷔 때부터 마일즈 데이비스가 시도하고 있던 펑크(funk)
리듬과 전자 사운드를 도입한 새로운 재즈를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윈튼은 당시 마일즈가 시도하고 있던 음악이 본질적으로 재즈가 아니라고 못 박았으며
팝, 록과 같은 백인 음악으로 기울면서 재즈 본래의 가치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재즈에 대한 윈튼 마살리스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다. 재즈는 미국 흑인들의 음악이며
동시에 그들의 고전음악인 것이다.
“퓨전이라는 음악이 기능하는 것은 우리와 이 나라, 심지어 재즈와
미국신화에 대한 흑인들의 기여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다.
재즈에서는 늘 이 질문이 존재해 왔다.
- 재즈란 팝 음악인가? 고전음악인가?”
윈튼이 데뷔하자마자 미국 최대의 음반사인 콜럼비아는 그와 계약을
맺고 윈튼에 대한 지원을 날로 늘려가자 이미 콜럼비아와 30여 년간의
장기계약을 맺어 온 마일즈는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워너브라더스로 이적하면서 두 사람간의 경쟁은 실로 가시화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경쟁은 종종 개인적인 감정 대립으로 비춰지곤 했다.
이들의 논쟁이 보다 생산적으로 발전한 것은 91년 마일즈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황제로 등극한 윈튼 마살리스에 대해 키스 자렛이
비판을 가하면서부터였다.
자렛 역시 마살리스의 트럼펫 연주에 대해 “잘 훈련된 고등학생의
연주를 듣는 것 같다”며 독설을 감추지 않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연마된 기교 뒤에 과연 재즈 본래의 ‘창조성’이라는 게
존재하는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러한 자렛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마일즈 데이비스에 관한 그의 입장으로 귀결된다.
키스 자렛은 1969년부터 71년까지, 그러니까 윈튼이 비판했던
마일즈의 음악 스타일이 출발한 시점부터 마일즈 밴드에서 건반악기를
연주했다. 그리고 그 시절 마일즈로부터 배운 교훈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자신의 가슴속에 새겼다. “투쟁을 원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리더들이란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을 때 희생된
자들이다.”
이 말은 30여 년에 걸친 자렛의 음악 여정을 집약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니까 마일즈 밴드에서 연주했던 그는 이후 듀이 레드먼(색소폰), 찰리 헤이든(베이스),
폴 모션(드럼)과 함께 4중주단을 결성해 이전에 오넷 콜맨이 추구했던 프리 재즈를
새로운 감성으로 재시도 했으며 동시에 장시간의 즉흥 독주를 통해 재즈 피아노의
새로운 장을 열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75년 작
<쾰른 음악회>(ECM)다.
키스 자렛의 즉흥연주는 재즈 피아노의 신기원이었다.
우선 그의 음색은 이전 재즈 피아노의 둥글고 끈끈한 맛을 제거했으며 투명하면서도
날카롭게 곧추 선 음색으로 적막한 콘서트홀 구석구석을 맑게 울렸다. 그의 연주는
베이스음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화성보다는 선율을 선명히 드러나게 했으며 그 선율의
정서 역시 기존 재즈의 정서라기보다는 유럽의 고전음악과 뉴에이지 음악의 장점을 과감히
수용한 것이었다. 아울러 게리 피콕(베이스), 잭 드죠넷(드럼)으로 구성된 그의 트리오는
이러한 그의 미감을 고전적인 스탠더드 해석에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빌 에반스 트리오
이후에 발전된 트리오 멤버 사이의 상호작용을 극한으로 발전시켜 30년 간 이 편성의
정상을 지금까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키스 자렛의 음악적 결과는 마일즈의 가르침을 그가 소화한 대로, 다분히 투쟁의
산물이었다. 자렛은 자신의 어법을 발견하기 위해 이전까지 비주류였던 빌 에반스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조명했으며 동시에 에반스를 넘어서려는 각고의 노력 속에서
프리재즈와 유러피언 스타일의 요소들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밝힌 대로 그에게 있어서 재즈란 “자신의 스타일을 계속해서 부정해 온
예술형태”인 것이다.
반면에 마살리스의 입장에 봤을 때 키스 자렛의 음악은 때때로 재즈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종종 그것은 그저 즉흥음악이며 뉴에이지 음악이다.
마살리스에게 미국 흑인의 고전음악인 재즈는 그 그간에 블루스와 스윙이 자리한다.
넓은 의미의 블루스적인 느낌 그리고 리듬에 있어서 흔들리는 스윙이 없다면 그것은
재즈가 아니다. 데뷔 당시 4중주 혹은 5중주 편성으로 마일즈 데이비스의 60년대
음악으로부터 출발했던 그가 7중주로 편성을 늘리면서 그의 고향인 뉴올리언즈
재즈의 초기 모습(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을 오늘날의 모던재즈와 결합하려
했던 것은 그의 음악관이 보다 ‘근본주의’로 향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80년대 후반부터 그가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링컨센터 재즈 오케스트라를 통해
마살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빅밴드의 거장 듀크 엘링턴을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마살리스의 관점은 재즈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음악이라기보다는 이미 완결
지워진 음악이며, 현재는 잊혀진 과거의 유산들을 발굴해서 새롭게 조망해야 할 유산인
것이다. 굳이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재즈가 아니라 재즈의 탈을
쓰고 재즈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이비 재즈’인 것이다.
이러한 윈튼의 입장은 그의 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전반의 지형을 바꿔 버렸다.
70년대 이후 고사(枯死)의 위기에 몰렸던 재즈는 윈튼에 의해 80년대부터 새롭게
부활하는 음악이 되었으며 줄지어 등장한 ‘영 라이온들’을 통해 90년대 초까지 재즈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로 접어든 지금, 재즈는 불행히도 다시 시장에서 가파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뒤바뀐 환경은 자렛과 마살리스의 대결마저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미 60세를 넘어선 자렛은 더 이상 투쟁할 내-외부의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마살리스 역시 이제 그를 매혹시킬만한 재즈의 유산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직면한 딜레마다. 그런 가운데 자렛도 마살리스도 수긍할 수 없는
상업주의 음악이 재즈란 이름으로 현재 시장을 횡행하고 있다.
모두가 노라 존스의 음반을 재즈라 부르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알 그린, 폴 앵카,
마이클 볼튼 등 쇠락한 팝 가수들이 재즈 음반사를 기웃거리고 있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재즈는 또 다른 라이벌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더 이상 라이벌이 없다는 것. 더 이상 논쟁거리가 없다는 것.
더 이상 재즈를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재즈의 참담한 비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