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삼성전자 백혈병, 그 어두운 진실 ④ “삼성에 바라는 것 없다, 내 병 원인만이라도…”
"나도 반도체공장서 일했다" "아내가 백혈병…"제보 쏟아져
지난 13일 5명 추가 산재신청 "억울함 풀릴 때까지 싸울 것"
"1라인과 8라인은 정말 차이가 컸어요. 1라인이 설거지 계수대라면 8라인은 식기세척기에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5년간 일하다 퇴직한 나아무개(34·광주시)씨가 지난 4월말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지적해온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에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다소 불편한 속마음이 읽혔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든 듯했다. 하지만, 입을 열기 시작한 나씨는 1시간 동안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포토공정에서 입힌 감광제를 벗겨내는 일을 했어요. 웨이퍼(둥근 원판 모양의 반도체 재료)는 손으로 다 만져야 했어요. 당시 공장은 대부분 수동설비였어요. 암모니아인지, 황산인지 알 수 없는 냄새가 너무 심했어요."
나씨는 지난 93년부터 기흥 공장 1라인에서 생산직으로 일했다. 삼성전자가 1984년 최초로 세운 반도체 가공시설이어서 공장은 많이 낡아 있었다. 그래도 나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5년 뒤인 98년 8월 갑자기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회사를 더 다닐 수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임파선 암인 것을 알았다. 10년간의 투병생활의 시작이었다.
나씨는 지금까지 자신의 병이 개인적 질병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항암제를 맞느라 머리털이 빠지고 가슴살을 칼로 도려내는 수술을 할 때도 '재수가 없으니 나만 이런 병에 걸렸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고 박지연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내 병이 산업재해일 수 있겠구나.' 나씨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지난 4월 15일. 텔레비전을 켰다. 삼성전자가 기자들을 상대로 깨끗한 생산 라인을 공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저건 아닌데. 거짓말이야." 결국, 나씨는 반올림 활동가들에게 자신이 반도체 공장에서 겪은 일을 털어놨다.
신아무개(31·전주시)씨는 지금 항암치료중이다. 의사에게 "몸 곳곳이 헐고 있다"고 들었다. 말하다가도 수시로 구토를 한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5년 5개월간 생산직으로 일하다 2005년 9월 퇴사할 때까지 건강하게 지냈는데 2009년 말 갑자기 어지럼증이 심해졌다. 병원에 갔더니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신씨는 언론에서 보았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논란 뉴스를 보고 반올림에 연락했다. "나도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일했다"는 신씨의 한마디에 반올림 활동가들은 한걸음에 전주까지 내려왔다. 반올림 활동가들을 보자마자 신씨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몸을 뒤척이기도 힘들 정도로 신씨의 병은 악화해 있었다. 신씨는 "삼성에 뭘 바라는 게 아니다"며 "내 병의 원인만이라도 알고 싶다"고 울먹였다. 이종란 노무사는 신씨의 손을 잡고 "함께 싸워서 함께 이기자"고 했다. 신씨는 또 눈물을 훔쳤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대한 위험성 논란이 커지면서 그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문제를 지적해온 시민단체 반올림에는 요즘 제보와 문의전화가 쏟아진다. 대부분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퇴직자들의 연락이다.
"제 아내가 백혈병에 걸렸어요." "삼성전자 온양공장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반올림 카페(http://cafe.daum.net/samsunglabor)에도 제보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한 달 사이에 20여건의 중요한 제보가 반올림에 접수됐다. 과거 2년 동안 반올림의 문을 두드린 제보보다 더 많다. 이 때문에 이 노무사 등 반올림 활동가들은 제보자와 통화하고 제보자를 만나느라 휴일도 잊은 채 일하고 있다.
2009년 5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렸던 고 박지연씨 등 4명에 대해 산업재해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삼성은 "안전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반도체 공장 위험성 논란은 수명을 다하는 듯했다.
그러나 '반도체 공장 백혈병 논란'은 밟아도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박지연씨가 지난 3월 31일 끝내 숨지자 논란의 바람은 다시 불었다. 이제는 "공장 내에서 수시로 화학물질 노출사고가 있었다"는 전직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의 공통적인 폭로까지 잇따르고 있다. 전 삼성전자 엔지니어 김아무개 과장은 지난 5일 < 한겨레 > 와의 인터뷰에서 "화학물질이 누출되면 경보음이 울려야 하는데, 경보음이 울리지 않고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만 알고 넘어가는 화학가스 누출사고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증언대열에 가담한 엔지니어들은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된 화학물질의 종류를 잘 알고 있는 기술직이었다는 점에서 그간 폭로된 발언보다 치밀하고 구체적이었다. '반도체 공장 위험성 증언'의 '2막'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5월 초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던 정아무개(24)씨가 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중인 것이 알려졌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양아무개(36)씨가 지난해 4월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불과 1년 만이다.
이 노무사는 "백혈병에 걸렸던 아이비엠(IBM) 노동자들도 산재 인정을 받았다"며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분들도 산재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쉽게 끝나지 않을 싸움임을 알리는 메시지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일단 삼성전자는 여전히 "산업재해는 아니다"는 입장이지만 이전보다는 더 신중한 자세다. 삼성전자는 반도체공장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재역학조사를 하겠다고 지난달 15일 발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메모리담당 조수인 사장은 "유가족들이 신뢰하지 않고 있는 근로복지공단 및 산업안전보건공단 대신에 '제3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장이 백혈병 원인을 제공했는지에 대해) 역학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장을 둘러싼 논란의 제2라운드가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이 문제를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무시해왔던 정부에서도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올해부터 매년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의 질병율 통계를 내기로 결정했다. 유의미한 숫자 이상으로 백혈병이 발생하는지 추적하겠다는 의지 표현이다.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 한겨레 > 취재진에게 "언론에서 백혈병 노동자 문제를 계속 다루어 사회적 관심을 유지시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난 13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한 노동자 5명이 추가로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이번에는 일반 생산직 노동자뿐 아니라 과장과 부장급 엔지니어들도 신청자에 포함됐다. 산재를 신청한 유명화(삼성전자 온양 반도체 공장 근무)씨의 아버지 유영종(53)씨는 근로복지공단 직원들 앞에서 울먹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줄 겁니까. 내 딸을 이렇게 만든 삼성이 사과를 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겁니다."
글/ 허재현 기자, 영상/ 김도성 피디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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