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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의 붉은 詩 外 / 이연분 시 모음

변산바람꽃 2010. 10. 19. 05:53

 

 

 

 


      =이연분 시인=

      월간문학세계 시 등단
      시낭송가
      도서출판운향 대표
      서정시마을 정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충남문인협회 회원
      시집『그대의 마음에 물들고 싶다』


      □ 뼛속의 붉은 詩
      □ 비 내려 꽃 지는 날
      □ 불법 유턴
      □ 삼백예순다섯 통의 그리움
      □ 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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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뼛속의 붉은 詩

                            
      비 오는 초저녁 낙지 집에 앉아
      남편은 술 한 잔을 내게 권한다
      오래 걸어서 먼지 나던 길 위에
      빗물처럼 스미는 축축한 연민,
      몸통과 다리 제각기 분리되어
      빨갛게 범벅이 된 낙지볶음처럼
      남편의 오늘은 위태했을 것이다
      젓가락 맞춰 들어올려
      입 안 가득히 집어넣으니
      우적우적 씹히는 말 못할 슬픔
      아, 내 생애 이토록 매워 본 적 있을까
      온몸과 마음, 속까지 붉히며
      진정으로 힘에 겨워 울던 적 있을까
      고단한 하루를 흥건히 마신 이 밤
      뼛속에서 붉은 詩가 흐르고 있다.



      비 내려 꽃 지는 날

                      
      간 밤 누군가의 가슴에 기대어 잠들었던
      여인의 숨결 같은 꽃잎 한 장
      거친 호흡 아래 떨어져 내립니다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이 죽어가는 날
      함께 지워지고 싶은 아득한 떨림,
      그 서늘한 흔들림 위에
      다시 바람이 불어오자
      나도 우수수 지고 맙니다
      그대, 나를 흔들어 꽃피운 이여



      불법 유턴



      장흥 유원지를 빠져 나오며
      서울로 가는 길목 놓쳐버렸네
      고양으로 벽제로 쉼 없이 달려가다
      교통신호 무시하고 돌려버린 핸들
      어쩌면 그대도 내 인생에서
      어겨버린 단 한 번의 불법유턴
      그 부끄러운 과거가 될지도 몰라
      돌아오는 내내 죄스러웠네
      빨간 불 켜진 신호등 앞에서
      그보다 더 붉게 죄스러웠네



      삼백예순다섯 통의 그리움
                                

      어머니,
      바람 차운 섣달 깊은 밤에 나는 또 편지를 씁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내 사랑의 모국어 어머니 당신에게
      길고도 긴 그리움을 씁니다.

      10남매 마디마디 살을 주고 뼈를 주고
      생리보다 붉은 피를 나눠주시고
      이제는 거죽처럼 말라비틀어진 어머니,
      싸구려 틀니 거북하게 끼고
      웃음조차 마음대로 피워내지 못하는
      당신의 묵은 슬픔을 볼 때마다 나는 늘 목이 멥니다

      품안의 자식들 헐렁이 떠나보내고
      혼자서 우두커니 지키는 시골집엔
      키 큰 옥수수대 서걱서걱거리며
      바람의 살결이라도 만져보게 하는지
      팔순의 세월동안 벗해 온 약봉지
      가지가지 약들만 쓸쓸히 둘러앉아
      알록달록 아픔을 세고 있는지
      세모의 길목에서 뜨겁게 차오르는
      당신께로 향하는 이 죄스런 마음을
      어머니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당뇨에 고혈압 심장병에 이어
      지금도 속 썩이는 디스크 허리까지
      혼자서 감당해 온 아픔의 무게가
      주절이주절이 눈물로 맺히는 밤
      쓰고 또 쓰고 또 써도 부족한
      삼백예순다섯 통의 그리움을
      어머니 나는 이제야 보냅니다.
      이제서야 철이 들어 당신을 그립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
      그러나 지상에서 가장 쓸쓸한 어머니여



      월말



      이용이었던가
      시월의 마지막 밤 노래를 애절하게 불렀던 이
      엊그제 만난 박건호 선생님은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던데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간 사람들 얼굴을
      지금도 모두 기억하던데
      시월의 끝날 거리에 서서 나는 이제 버리고 싶다
      쓸려나간 저 몇 잎의 잎들처럼 젖은 이름과
      단풍으로 매달린 색색깔의 아픔들
      그 처연한 이름을 이제는 그만 버리고 싶다
      납부해야 될 공과금 명세 줄줄이 쌓아놓고
      관리비 고지서에 한숨 한 번
      카드 값 내역서에 시름 몇 번
      몇 장의 KT 전화요금에 버리지 못한 눈물을 함께 담아
      내게서 멀리 떠나보내고 싶은 기억들이여
      고장 난 공과금 기계대신
      능숙한 솜씨로 출납인을 찍어주는 은행원처럼
      고장 난 내 감정의 골수에도
      선명하도록 진한 출납인 하나 찍어다오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처의 기쁨을 밀어내 다오
      시월의 마지막 날이여 굿바이
      오래된 서글픔이여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