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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 / 김봉준 화백의 <우리 디자인의 정체성 어떻게 살릴것인가>에 대한 견해의 일부...

변산바람꽃 2011. 3. 25. 01:50

 

 

김봉준 화백의 <우리 디자인의 정체성 어떻게 살릴것인가>

- 그 방법과 철학-

 

1. 들어가며 

- 나의 오늘 디자인 이야기는 한국디자인학계와 다른 비주류, 두국민정책의 산물 

- 비주류 일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성격 , 우리문화원형탐구시대, 민주화운동시대, 지역생태주의시대

- 창조적 비주류의 문화

 

2. 그 방법

- 나의 시각이미지 방법들: 판화, 회화, 조각, 디자인의 이미지 소개

- 작업의 방법론: 붓그림론, 목판화론, 시서화론

- '낯선 침입자', 그 작업의 행동양식 

 

3. 그 예술철학

- 수용자미학, 소통의 미학

- 교감정신, 그 관계론의 미학

- 신화의 예술, 예술의 신화

- '영혼의 미'로 가는  삶의 구도 

 

4. 디자인의 새로운 모델 

- 디자인의 새로운 모델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나?

- 그 새로운 모델을 실천할 교육 방법론은?

- 이 두가지,  디자인의 세계관과 방법

 

* 주요 개념어 해재

 

-창조적 비주류: 경제적 정치적 제도권 밖에서 생존양식을 가진 자의 제언, 제안들이 창조성을 가진며 제도권문화의

경직성을 무너트리며 새로운 창조적 활력을 만든다.

 

- 두국민정책: 이것은 한나라의 국민을 둘로 나누어서 통치하는 지배의 정책이다. 한쪽을 아방으로 포용하고 다른 한쪽을

배제하는 전략으로 이원론과 대립의 이념이다. 일제 문민통치, 박정권의 유신통치가 그렇다. 유신통통치는 한편을 산업화

국민으로 수용하고, 다른 한편을 빨갱이 이념집단으로 배제시켜왔다. 여기서 선성장 후분배론, 선산업화 후민주화론이 나왔다.

그런데 분배와 민주는 성장과 산업화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 진행의 과제 였다. 이 배제의 전략으로 한국사회는 갈등의

상습화가 되었다. 문화예술에서도 창조적 역동성을 잃고 제도권과 비주류로 벽이 생겼다.

 

- 문화원형: 아키타입의 번역어다. 원래 아키타입은 칼융의 학문이다. 본능이 발현하는 형식으로 무의식적 사고라는 형태로

무의식적 형식이다. 생물종에는 행동의 유형이라부르고 인류종에는 민족적 집단무의식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원형은 자신을

구체적으로 들어내는 상징을 갖는다. 상징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나타내기위한 최선의 방도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진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지역생태주의: 인류문명도 자연생태계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한다는 이념으로 산업문명이 지구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보며

이를 넘는 탈산업사회모델을 다야한 대안으로 모색한다. 중간기술, 느림의 미학, 스로우후드, 유기농, 자연살이 지역공동체,

환경, 재생가능한 에너지, 생활정치, 대안교육, 주민자치, 생협, 생명평화론, 녹색당 등이 이 흐름에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

비하여  통합적 전략과 모델이 아직 없다. 지역을 넘어 지역연대의 모델이 없다. 산업국가주의 시스템이 그만큼 간고하다.

 

- 창조적 비주류: 배제와 수용의 이분론으로 장벽이 두텁고 소통부재의 사회에서는 주류와 비주류의 대합류만이 역동적인

창조시대를 열것이며 여기서 창조력을 준비해 온 비주류의 역할이 중요하다.

 

- 붓그림론: 동북아 유목족의 문화원형 형식이다. 길로 가늘고 고탄력인 황모붓의 재료미학은 동북아 장인학의 백미이다.

 

- 목판화론: 동북아 목판화전통은 1만년을 상회하는 오랜전통이다. 즉 북방 시베리아에서 울주군까지- 암각화 상형문화

전통으로부터 오는데 여기서 목판화양식이 파생한다.  사의적 선각, 간명한 형상, 암호문자(Kryptogamn)  타이포그라픽의

원형미와 연결된다. 그리고 붓그림 초본을 따른다.

 

- 시서화론: 시는 세계의 문자적 인식의 정수이고 서는 그것의 형상미이고 화는 세계의 직관적 이해와 해석의 정수이다.

이 세가지가 하나의 공간안에 공존한 것이 암각화 상형문자 글그림시대이다. 여기를 모태문화로 서체, 준법, 문체가 나온다.

그리고 동양미술의 차별적 특징인 통섭형시각예술이 지속적으로 내려온다. 이는 청산적 전통이 아니라 21세기 디자인

숙제를 풀 열쇠문이다.

 

-  낯선 침입자: 나와 같은 아웃사이더 국외자의 시선과 겹겹의 장벽으로 막힌 불통의 문화에서 침입의 전략은 유효하다.

전통문화, 서구모던이즘 교육, 산업노동자, 농민, 농촌, 민주화의 업압지대를 침입자처럼 들락날락하던 체험이 이종교배의

새 문화를 산출한다. 돌이켜보면 침입지대에 동화되지도 않고 이방인이지도만 않 정주적 유목인이다. 

 

- 수용자의 미학 : 1960년대 독일 미학의 한 조류이다. 과거의 예술이 공급자 중심으로 일방적인 미학이었다면 앞으로는

수용자의 미적 욕구가 중요한 시대가 온다고 보고 수용자의 요구를 반연하는 작업, 수용자자 참여하는 예술프로그램,

수용자가 직접 진행하고 만들어가는 예술을 강조한다.

 

- 소통의 미학 :  너와 나의 상호 소통으로 미적 스파크가 결정적 단서가 되어 정서형식을 이룬다는 것이다.

 비근한예로 나의 님얼붓그림은 시민과 소통의 산물이다. 내용은 시민이 내오고(소망글과 얼굴모델), 형식은 자각가

붓그림으로 내와서 하나을 이룬다. 소통의 산물이다. 

 

- 존재론과 관계론: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구조적 시각이다.

이시각은 인간도 세상도 피조물적 존재이고 물화한 존재이다. 개개의 영혼을 부정한다.  또하나는 만물이 일여한데 서로

의존하며 공생한다는 범아론이다. 이천식천, 물아일체이다. 서로 인연과 관계로 내가 존재하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에 하나도 없다는 시각이 관계론적 세계관이다. 예술철학도 이 철학적 관점에 따라 갈린다. 관계론적미학으로 구도와

형상방식을 찾자면 늘 불완전성과 무상성과 비움과 채움의 질서, 카오스모스의 질서를 인정한다.

 

- 신화의 예술: 저 신화시대 즉 구석기 신석기시대, 인류 선사시대의 예술은 신화와 의례와 놀이가 함께 하나의 문화였다.

여기서 예술은 의례이면서 예술이다.

 

- 예술의 신화: 현대예술은 파편화되고 산업시대 기능주의로 취급된다. 세기말적 예술의 종언이다. 더이 상 갈 곳이 없다.

다시 영혼의 예술을 찾고 재신화화를 꿈꾼다. 예술인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갈구하는 인류의 '마지막 샤만'이다.

이를 재신화화시대라고 신화학에선 말한다. 

 

- 영혼의 미: 모든 생물에서 무생물까지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범신론적 영혼관이다. 이는 오랜 동아시아 샤만이즘 전통의

계승이고 우리 굿문화권의 영혼관이다. 나무, 바람, 풀, 새, 가축에게도 다 영혼이 깃들며 미적 교감은 이 영혼의 소통이

될 적에 온전한 소통이 된다고 보는 것이 영혼의 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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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에 대한 견해의 일부...(강미)

선생님...최근 정보화의 확산으로 지구촌 구석구석의 문화적 행위가 예술로서 서로 공유되어지는 시간이 빨라지고

있지요...이러한 변화는 캄보디아 밀림 속에 감춰진 그 땅의 역사적 산물로 나타나는 제례의식이 하나의 문화로서

개별적 가치를 인정받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만의 신화적 존재를 현재적 가치로 공유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싶더군요...모든 문화형성에 제례가 하나의 의식으로서 기여하지만 그에 직접적으로 근거해서 파생한 예술 행위

외에는 모든 개별문화의 제례에서 찾아지는 신화적 의미를 예술로서 보기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는 진도 씻김굿에서 느꼈던 감정이입을 경험할 수 있었으나 굿거리에서 작두춤 같은 극도의 행위에서는 이질감을

느꼈거든요...의식이라고 보기에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구요...마치 아프리카 케냐

부두족의 주술행위에서 느꼈던 극도의 두려움 같은 느낌이랄까요...그런 유사한 이질감을 예술행위라고 보여지는

파괴적 포퍼먼스 같은 행위에서 느낄 때가 있구요...뭐 다양해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요...따라서 문화적 예술

행위의 보편적 역사성은 그 예술 행위가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기인한 것인가 아닌가로 이해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위의 견해는요 디자인의 예술철학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제목에서 든 생각입니다...디자인이 수용과 소통을

근간으로 한 예술적 행위로서 신화까지 포용하여 그 뿌리를 찾아본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구요...

의문이 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