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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블랙스완 - '완벽 위한 파멸' 몰아붙인 감독, 소름끼치게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

변산바람꽃 2011. 3. 28. 18:10

 

 

[영화읽기] 블랙스완 - '완벽 위한 파멸' 몰아붙인 감독, 소름끼치게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


[미디어오늘이안·영화평론가]

< 블랙 스완 > 은 감독인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집요하리만치 줄곧 파고들었던 주제와 스타일이 배경과 소재를 바꿔 변주된 영화다. 그러니까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미 숱하게 내비쳐왔던 어떤 분야든 지극한 경지에 가닿고 싶은 인간의 열망, 그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아는 분열되고 파멸에 이르는 대신 몸이거나 영혼 둘 중 하나가 막다른 꼭지점에 도달해야 끝나는 강박, 스스로 강박인 걸 알더라도 이미 자의로 벗어날 수 없는 비범한 목적에의 중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1998년 첫 장편 영화인 제작비 6만 달러짜리 저예산 흑백영화 < 파이 > 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이래 비평에서든 흥행에서든 화제가 되는 영화를 거의 해마다 한 편씩 만들어냈다. 상복도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가장 대런 아로노프스키스러운 영화로 꼽히는 < 블랙 스완 > 에 대해 아카데미는 감독상이나 작품상이 아니라 주연 배우 나탈리 포트만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 주었다. 이태 전, < 레슬러 > 를 두고도 영화가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지 못한 것보다 미키 루크가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걸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아카데미의 결정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왜 그럴까?





영화 '블랙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 파이 > 에서부터 < 블랙 스완 > 에 이르기까지 캐릭터나 내러티브도 독특할 뿐더러 카메라를 배우의 몸에 달아맨다거나, 카메라 렌즈 앞에 파문을 일으키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를 사용한다거나, 영화 전체를 흔드는 듯한 카메라로 스크린을 불안하게 떨리게 한다거나, 주인공의 뒤를 불안하게 밟는다거나, 화면을 이리저리 쪼개 하나의 화면에 여러 인물이나 상황을 동시에 펼쳐 보이거나 하는 치밀하면서도 감각적인 촬영과 편집으로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추구하는 집요한 감독인데도.

무엇보다도 < 블랙 스완 > 은 감독 또는 작품 자체가 배우 또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을 지독하리만큼 몰아붙였고,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감독의 의도에 배우가 소름 돋을 정도로 들어맞는 연기를 보여야만 완성될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 블랙 스완 > 은 프리마돈나로 최고가 되고자하는 발레리나가 혹독한 훈련과 극기, 경쟁, 불안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자리에서 자신을 거기까지 오르게 한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혼자 파멸로 치닫기까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 과정을 오롯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영화에 동원되는 모든 요소 가운데 발레리나를 연기하는 배우 자체여야만 작품이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은 그 힘든 일을 해냈다.





영화 '블랙스완'

< 블랙 스완 > 의 이야기는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영화의 줄거리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이었던 안데르센이 화려한 붉은 신에 매혹된 소녀의 파멸을 그린 동화 < 분홍신 > 을 씨줄로, 왕자와 사랑을 이뤄 마법에서 풀려나길 꿈꾸었으나 자신의 모습으로 왕자의 사랑을 가로 채버린 흑조 때문에 영영 마법에 갇힌 백조의 자살을 그린 발레 < 백조의 호수 > 를 날줄로 하고 있다.

신어서는 안 될 분홍신을 탐내 한 번 그 신에 발을 넣은 순간부터 오직 춤을 추는 것 뿐, 도저히 멈출 수 없었던 < 분홍신 > 의 소녀는 엄마 장례식에서조차 벗겨지지 않는 신발의 마법에서 헤어나질 못해 더 이상 춤이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 되자 마침내 신을 신은 두 발을 도끼로 잘라내고서야 춤을 멈춘다. < 백조의 호수 > 에서 마법에 걸려 백조가 된 공주는 우연히 왕자의 화살에 표적이 된 다음부터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되찾을 희망에 부풀지만 겉만 비슷하면 속은 사악한 흑조라 할지라도 왕자의 마음을 홀릴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한 순간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음에 이른다.

가혹히 몰아붙인 감독, 기꺼이 혹사당한 배우가 만들어낸 최고의 조합

포트만, 완벽할 수 없는 발레 대신 떨리는 눈빛으로 스크린 채워





영화 '분홍신'

이런 비극적 인물을 영화에서 발레로 표현하는 건 마이클 포웰 감독이 1948년에 만든 < 분홍신 > 의 주인공 모이라 셰어러를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이미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던 모이라 셰어러의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한 몸놀림은 아무리 어릴 때부터 발레를 익혔으며 무려 8년 동안 영화를 위해 뼈가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했다고 해도 배우인 나탈리 포트만이 따라 잡을 수 없다. 몸매나 자세는 그럴 듯하게 가다듬을 수 있어도 정교하게 틀이 잡힌 예술의 경지는 노력해서 되는 것도, 흉내를 기교로 커버해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탈리 포트만이 아무리 노력해도 < 분홍신 > 이나 < 호프만 이야기 > 에서의 진짜 발레리나 모이라 셰어러처럼 춤을 출 수는 없다. 대신에 나탈리 포트만은 연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역에 대한 부담감으로 신경증에 사로잡힌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 발레리나의 무대가 아니라 배우의 자리인 스크린에서 그런 불안정한 모습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승부수가 되었고, 그 눈빛과 몸짓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끌어낸다.





영화 '블랙스완'

대역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 모이라 셰어러가 춤을 출 때 < 분홍신 > 의 카메라는 가능한 한 무대 전체와 인물의 동작 모두를 풀 숏으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인물이 아니라 그 인물을 통해 구현되는 퍼포먼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 블랙 스완 > 은 춤을 추는 장면을 딱 필요할 때만 진짜 발레리나인 대역을 세워 멀리서 롱 숏으로 잡거나 아슬아슬하게 선 발끝으로만 보여주고, 대부분의 춤추는 장면에서는 나탈리 포트먼이 연기하는 니나를 얼굴 표정 중심으로 클로즈업한다.

이렇게 몸 전체로부터 파편화된 얼굴과 신체는 발레 연기의 미진함을 감추는 트릭일 수도 있지만, 니나가 맞닥뜨린 영화 속 무용계의 부조리나 나탈리 포트만이 감당해야 하는 악착스런 영화 현장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적 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탈리 포트만이 받은 여우주연상은 < 파이 > 를 만들 때 영화가 수익을 올리게 되면 투자한 사람들 각각 150달러 이상을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100달러씩 모아 제작비 6만 달러를 만들고 배우와 스탭의 동참을 이끌어 냈던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영화가 성공하자 참여한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수익을 나누었던 것처럼, 니나를 연기하기 위해 배우로서 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영화 속에서 보여준 배우 나탈리 포트먼과 감독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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