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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노동절을 중심으로 5월에 있는 기념일을 돌아보기

변산바람꽃 2011. 5. 3. 11:25

 

 

5월 1일 노동절을 중심으로 5월에 있는 기념일을 돌아보기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지요...

유난히 행사도 많고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 화려하지만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오월은 피로 얼룩진 아픔도 갖고 있지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노동절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월을 들여다보며 오월에 있는 기념일들을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아침 유난히 날씨가 좋습니다.

행복한 시간들 되세요....(강미/변산바람꽃)

 

 

 

♣ 5월1일 노동자의 날 (5/1)

 

경제의 밑바탕에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경제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의 피와 땀 때문입니다. 노동자의 날 즉, 메이데이는 이러한 노동자의 피와 땀을 위로하기 위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절이라고 하기도 하고 노동자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국제 공식명칭은 메이데이죠. 5월 1일이 노동자의 날로 된 것은 1886년 미국에서 노동자들이 1일 8시간 근무를 이루기 위해 총파업한 날이 5월 1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노동자는 노예나 마찬가지의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12시간이상의 노동을 하면 자본가의 배를 채워주고 있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이상의 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생계비조차 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노동자 전태일을 아시죠? 그 역시 한국의 자본가의 노동착취에 대항한 것처럼 미국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노동착취에 대항하여 총파업이 이루어졌고 이날을 메이데이 즉, 노동자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1. 메이데이의 유래

 

1) 미국 시카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투쟁

1886년 미국,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 장시간의 노동에 일주일에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잣집의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멈추고, 공장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고 상가도 문을 닫고 운전수도 따라서 쉬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으면 세계가 멈춘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힘에 가슴이 부풀 어올랐다.

 

그러나 경찰은 파업 농성중인 어린 소녀를 포함한 6명의 노동자를 발포 살해하였다. 그 다음날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 시민이 참가한 헤이마켓 광장 평화 집회에서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지고 경찰들이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이후 폭동죄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억울하게 폭동죄를 뒤집어 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장기형 또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이 바로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키트 사건이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이렇게 최후 진술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이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내 이웃과 내 동료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코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나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내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닌가? ...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였던 것이 증명되었다. 그들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2) 5월 1일 미국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 노동자의 기념일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 나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1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하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각 국의 형편에 맞게 제1회 메이데이 대회를 치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 여름으로 드는 입하(立夏)(5/5)

 

24절기 일곱 번째로 양력은 5월 5~6일경이며,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있다. 태양의 황도가 45도 때인데 '여름(하:夏)에 든다(입:入)'는 뜻으로 초여름의 날씨를 보인다. 절기로 보면 여름은 입하에서부터 시작하여 입추(立秋)전까지이다. 옛사람들은 입하 15일간을 3후(三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청개구리가 울고, 중후(中候)에는 지렁이가 땅에서 나오며, 말후(末候)에는 쥐참외가 나온다고 하였다.

 

이맘때면 곡우 때 마련한 못자리도 자리를 잡아 농삿일이 좀 더 바빠진다. 푸르름이 온통 산과 강을 뒤덮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리는 절기이다. 서울 송파지역에서는 세시풍습의 하나로 쑥무리를 절식(節食)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때는 이팝나무에서 흰 쌀밥 같이 온 나뭇가지를 뒤덮으며 흰꽃이 핀다. 그래서 이팝나무를 쌀밥나무라고도 부르는데 꽃이 한꺼번에 잘 피면 그해 풍년이 들고, 꽃이 신통치 않으면 흉년이 들 징조라고 믿었다.

 

보통 녹차는 곡우전에 딴 우전차, 입하 때 딴 차인 세작을 최상품으로 치지만, 조선시대 차의 성인 초의(艸衣)선사는 '우리의 차(茶)는 곡우 전후보다는 입하(立夏) 전후가 가장 좋다'고 하였다. 우전차는 신선하고 향이 맑기는 하지만 우리에겐 완숙하면서 깊은 여름차가 더 잘 맞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전통차는 덖음차로서 된장찌개와 숭늉의 깊고, 구수하며, 담백한 맛을 닮은 차를 만드는데 여름차가 더욱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우전차를 우대하는 것은 일본에서의 생각으로 이제라도 전통차의 철학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전통한국차를 지켜온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의 주장이다.

 

 

♣ 어린이날(5/5)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창하여 1923년 5월 1일,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날은 1921년 5월 1일, 소파 선생이 주동이 된 '천도교 소년회'에서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라는 표어 아래 처음으로 소년운동을 시작한 지 정확히 2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 후 어린이날은 일제의 강압과 방해로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열리기도 했고 어떤 해는 아예 행사도 못 치른 경우도 생겼었다.

 

하지만 어린이날은 소파 선생의 숭고한 정신으로 살아남아서 그 명맥이 유지되어 오다가 1957년,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 선포되면서 지금의 5일 5일에 열리게 되었다.

 

★ 일본의 어린이날 과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의 차이

일본의 어린이날이 우리나라와 우연히 날짜는 같지만, 유래도 다르고,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일본의 어린이날은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에서 유래되었으나, 음력으로 쇠지 않고 양력으로 쇤다. 그런데, 일본의 어린이날은 남자 아이들만의 날이며, 달력에 빨강 글씨로 표시된 국경일이다 . 이에 비해, 여자 어린이날은 ‘히나마쯔리’라고 하며, 3월 3일인데, 히나 인형을 장식하며, 국경일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어린이날이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 방정환과 어린이날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생.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용화(溶*)와 결혼하고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20년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23년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고, 28년 세계 20여 개국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의 구연동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사랑의 선물(1922)》을 비롯한 개작번안·창작동화를 남겼으며 《어린이》지를 통해서 신인아동문학가를 발굴하였다. 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78년 금관문화훈장, 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1940)》 《소파동화독본(1947)》 《소파방정환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있다.▣

 

 

♣ 어버이날 유래 (5/8)

 

조상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를 헤아리고 어른과 노인에 대한 존경과 보호를 다짐하는 날. 5월 8일. 어버이날의 유래는 사순절의 첫날부터 4번째 일요일에 어버이의 영혼에 감사하기 위하여 교회를 찾는 영국·그리스의 풍습과,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에서 연유한다. 14년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T.W.윌슨이 5월의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한 것이 시초이다. 외국에서는 5월의 두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하여 어머니가 생존한 사람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사망한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각종 집회를 열며,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어머니에게 선물을 한다. 한국에서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할아버지·할머니까지 포함하고, 조상과 모든 어른을 위한 날로 규정하였다. 원래의 ‘어머니날’을 74년부터 개칭하여,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며 공휴일은 아니다. 1973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공포·시행하여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하였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원래는 어머니날이었으나 부모님들에 대한 공평성을 위하여 어버이날로 고쳐서 지켜오고 있다 이날은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고, 어른과 노인을 공경하는 효친 사상을 기리는 전통적 우리문화를 접목한 기념일'이다. 어버이날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기념일이 아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안나라는 처녀에 의해서 전파된 일이다 안나는 평소 어머님의 말씀에 그렇게 순종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너무도 어머니가 그리워 평소 어머니가 좋아했던 카네이션을 준비하여 교회 어른들에게 선물을 한 것이 어머니날의 시작이다

그 후 1914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5월의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한 것이 그 시초이다 당시 어머님이 생존해계신분은 빨강색 카네이션을 어머님이 돌아가신 분들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았다

 

어버이날은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정하여 경로 효친의 행사를 하여 오던 과정에서 '아버지의 날'이 거론되어 1973년에 제정, 공포된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서 '어버이날'로 변경, 지정하였다

 

 

♣ 사월초파일(5/15)

 

1. 사월 초파일의 유래

이 날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 하여 불탄일(佛誕日) 또는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나, 민간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석가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원래는 불가(佛家)에서 하던 축의행사 (祝儀行事)였으나 불교가 민중 속에 전파됨에 따라서 불교 의식도 차츰 민속화 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여러 가지 불교행사가 성했는데,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불교를 호국(護國)의 바탕으로 참여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불교행사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세시행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병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불교행사가 신라의 세시풍속으로 승화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월 초파일은 불도의 행사가 신라의 호국불교로 승화된 이래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민속과 동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와 고구려 본기에는 불도의 행사가 세시의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석가모니 탄생일을 팔관회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고려사 (高麗史)》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일, 15일 이틀간을 저녁에는 연등(燃燈)을 하던 풍속이 있었으나 최이(崔怡)가 4월 8일로 옮겨서 하게 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축의행사로 전래되었다가 민간의 세시풍속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2. 사월 초파일의 풍속

이 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은 관등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을 관등절, 연등절 또는 등석(燈夕)이라고도 한다. 초파일을 여러 날 앞두고 가정이나 절에서는 여러 가지 등을 만든다. 이 때 가정에서는 가족의 수대로 등을 만든다. 초파일 며칠 전부터 뜰에 등간(燈竿)을 세워 두고 간상(竿上)에 꿩 꼬리털을 꽂고 물들인 비단으로 기를 만들어 다는데, 이를 호기(呼旗)라고 한다. 이 호기에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 등간을 만들지 못하는 집에서는 나뭇가지나 혹은 추녀 끝에 빨래 줄처럼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매달아 두기도 한다. 그리고 초파일 저녁이 되면 등에 불을 밝힌다. 이 등석 행사는 그 이튿날인 9일에 그치는데, 부유한 집에서는 큰 대를 수십 개씩 얽어매어 쓰기도 하고 해와 달의 형상으로 만들어 꽂아서 바람에 따라 굴러 돌게 하기도 하며, 굴러 돌아다니는 등(轉燈)을 매달아서 그 등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마치 탄환이 달아나듯 하게도 한다.

 

때로는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이것을 노끈이나 또는 새끼줄에 얽어매어 불을 당기면 터져서 꽃불같이 비 오듯 하게도 하고, 종이로 용을 만들어 바람에 날려 띄우기도 하며, 또는 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얽어 띄워서 요동케 하여 놀기도 한다. 또 옛날 각 상점에서는 등대를 서로 높이 세우려고 다투어 승부 삼아 만들기도 한다.

 

등의 모양은 과실, 꽃, 어류 또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을 본떠서 만들기 때문에 그 이름만 해도 수박등·마늘등·참외등·연화등·목단등(牧丹燈)·잉어등(鯉魚燈)·거북등·봉등(鳳燈)·계등(鷄 燈)·학등(鶴燈)·오리등·일월등(日月燈)·선인등(仙人燈)·칠성등(七星燈)·고등(鼓燈)·누각등( 樓閣燈)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등에는 '태평만세(太平萬歲)' '수복(壽福)' 등의 글을 쓰기도 하고, 기마장군상(騎馬將軍像)이나 선인상(仙人像)을 그리기도 한다. 또 화약을 층층으로 새끼줄에 매달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튀면서 퍼지는데, 이러한 놀이로 흥을 돋우기도 하고 때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줄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리게 하여 놀기도 한다. 그런데 등을 달았을 때 불이 환하게 밝으면 길조로 해석한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사월 초파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가와 관청, 저자에서는 모두가 등간(燈竿)을 세운다. 이 등간은 대나무를 연하여 묶고 그 높이는 십여 장(丈)이나 된다. 등간 위에는 비단이나 면포를 잘라서 꽂으며 깃발 밑에는 갈고리가 달린 막대기를 가로 대고 또 갈고리에는 줄을 얹어서 줄의 좌우 끝은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한다. 그런 연후 밤이 되면 등에다 불을 켜는데 많이 달 때는 십여 개의 등을 달고 적게 달 때는 3, 4개의 등을 매달아 놓는다. 일반 민가에서는 아이들 식구 수대로 매다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등을 매단 모양이 층층히 연하여 마치 구슬을 꿰맨 모양같이 보인다.

먼저 줄 한 끝을 꿰어 매고 그 다음에는 아랫등의 꼬리 편을 매어서 이것을 가만히 잡아 올리면 그 등을 매단 줄의 갈고리까지 한꺼번에 위로 올라간다.

 

등은 마늘, 외, 꽃잎, 새, 짐승 같은 형상의 것, 또 누대(樓臺)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각양각색으로 꾸며져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키는 어렵다. 어린아이들은 등대 밑에다 깔개를 깔고 느티떡, 소금물에 볶은 콩 등을 먹으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돌리면서 바가지를 두드린다. 이 놀이를 수부(水缶) 즉 물장구 놀이라 한다. 중국의 연등회(燃燈會)는 정월 보름에 행하는 것으로 우리나라는 4월 8일에 행한다. 이 날의 근원은 불교에서 나왔고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다.

 

 

♣ 스승의 날 유래(5/15)

 

"5월15일은 RCY에서 제정한 스승의 날입니다."

RCY단원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시작된 스승의 날

 

충남 강경여고 RCY단원들이 1958년부터 현직의 선생님과 병중에 계시거나 퇴직하신 선생님을 위문하는 봉사활동을 해오던 중 1963년 청소년 적십자 충남협의회에서 9월21일을 충남도내 '은사의 날'로 정해 일제히 사은 행사를 가지기로 결의하였으며 이를 본보기로 삼아 1963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개최된 제12차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는 스승을 위한 '은사의 날'을 5월 24일로 정하여 기념할 것에 합의하였다. 다음해인 1964년 5월 개최된 제13차 협의회에서는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고쳐 부르기로 하고 날짜도 5월 26일로 결의하였다. 또한 '스승의 날' 제정취지문을 작성 발표함으로써 이때부터 제1회 스승의 날이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에 의해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1965년 4월 제14차 협의회에서는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기로 다시 결의하였고 기념회수는 1964년 제1회 기념일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동협의회는 전국 초중고 학생회장들에게 스승의 날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제2회 스승의 날 기념식을 개최하도록 호소문을 보냈으며 대한적십자사에서는 스승의 날 노래(윤석중 작사, 김대현 작곡)를 만들어 방송 및 기타 보도매체를 통해 보급함으로써 1966년부터 이 행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73년 3월 모든 교육관련 기념행사가 국민교육헌장선포일로 묶이면서부터 '스승의 날' 행사는 소흘해 지기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사은행사는 규제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은 계속하여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왔으며 1982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은 다시 부활되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2000년으로 37회를 맞고 있다.

 

현재도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은 선배들이 제정한 스승의 날이 되면 선생님께 감사 편지쓰기, 사랑의 꽃 한 송이 전달하기, 선생님 구두 닦아드리기, 병중이시거나 퇴직하신 선생님 찾아뵙기, 음악회나 다과회 등의 사은행사 준비하기 등 다양한 행사를 학교별로 개최한다. 또한 RCY시도본부에서는 스승의 은혜를 알리는 기념스티커를 제작하여 각 학교에 배부하여 출입문 등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부착해 그 의미를 널리 보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문예작품을 공모하여 문집을 발행하기도 한다.

 

■ 스승의 날 제정 취지문

인간의 정신적 인격을 가꾸고 키워주는 스승의 높고 거룩한 은혜를 기리어 받들며 청소년들이 평소에 소홀했던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불러 일으켜 따뜻한 애정과 깊은 신뢰로써 선생님과 학생의 올바른 인간관계를 회복함으로서 사제의 윤리를 바로잡고 참된 학품을 일으키며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을 교육하는 숭고한 사명을 담당한 선생님들의 노고를 바로 인식하고 존경하는 기풍을 길러 혼탁한 사회를 정화하는 윤리 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이「스승의 날」을 정한다. (1964년 5월 16일 청소년적십자중앙학생협의회 결의문)

 

■ 보충설명

스승의 날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하여 1964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처음 제정되었습니다. 최초의 발단은 충남 강경고등학교(당시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적십자로 1958년부터 단원들 [주도학생 윤석란:1946년생]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 위문과 퇴직하신 스승님 위로활동을 꾸준히 하였으며 이에 청소년 적십자 충남 학생협의회는 1963년 9월 21일을 충남 도내 '은사의 날'로 처음 결정하여 사은 행사를 개최 후 1963년 '은사의 날'로 이름을 바꾸어 5월 26일에 개최하기로 수정결의 후 제정 취지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제1회 '스승의 날'이 전주의 청소년적십자 단원 등에 의하여 기념되기 시작하였고 1965년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15일을 '스승의 날'로 다시 정하고 스승의 은혜를 기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적십자 중앙 학생회협회는 전국의 초.중.고 학생회장들에게 '스승의 날'제정 의의와 제2회 '스승의 날' 기념식 개최 호소문을 보냈다. 이에 대한적십자는 '스승의 날' 행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73년 이후 '스승의 날'사은 행사가 한동안 규제되었으나 1982년 5월15일 스승의 날이 부활되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다시 스승의 은혜가 기념되고 있으며 강경여자 중.고등학교 교정에 2000년 5월 14일 RCY(청소년 적십자)지도교사 전국 협의회에서 성금(1억2천만원)을 모아 건립하여 매년 스승의 날 행사를 강경여자 중.고등학교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 한국과 중국의 단오절(음 5/5)

<단오의 의미와 유래>

한국과 중국에서 음력 5월5일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세시명절 중 하나이다. 동양사회에서 숫자로 보면 홀수는 음양(陰陽)가운데 양(陽)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달(月)과 일(日)의 수(數)가 모두 양(陽)으로 겹치는 음력 3월3일, 5월5일, 7월7일 등의 명절에는 햇볕(陽의 기운)이 가장 강하다고 하여 갖가지 성대한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음력 5월5일 역시 이러한 명절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는 단오절(端午節)이라 불리어 왔다. 단오(端午)의 의미는 초오(初午)라는 뜻으로 음력 5월의 첫 오일(午日:말의 날)을 뜻한다. 단오는 또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등으로도 불리고, 한국에서는 수릿날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오월절(五月節)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하다. 대표적인 학설을 몇 가지 들자면 시절전래설(時節傳來說), 조아고사설(曺娥故事說), 오자서고사설(伍子胥故事說), 굴원고사설(屈原故事說)등이 있다.

 

1. 시절전래설(時節傳來說)

단오절의 풍습이 생겨난 것은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하는 음력 5월을 맞아 악질(惡疾)이나 액환(厄患)을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예방(豫防) 풍습이 생겨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약초(藥草)나 창포(菖蒲)를 사용하거나 쑥으로 인형(人形)을 만드는 풍습에서 보이듯이 향(香)이 강한 풀이나 약초(藥草) 등으로 액(厄)을 예방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명절로 정해진 것으로 보는 주장이다.

 

2. 조아고사설(曺娥故事說)

중국 동한(東漢)시대에 조아(曺娥)라는 효녀의 고사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어느 날 조아의 부친이 강에 빠져 익사를 했다. 당시 14세이던 조아는 강을 따라 통곡하며 부친의 시체를 찾아 헤매었지만, 17일이 지나도록 그 부친의 시체는 찾지 못했고, 마침내 5월1일 그녀 역시 강물에 몸을 던졌다. 5일에 함께 부둥켜안은 두 부녀의 시체가 강물위로 떠올라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동네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설이다.

 

3. 오자서고사설(伍子胥故事說):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사람이던 오자서(伍子胥)의 부친이 초나라 평왕(楚平王)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분개한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건너가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도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 평왕의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 채찍질을 함으로써 부친의 복수를 했다. 그런데 오왕 합려가 죽은 후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전횡을 일삼으며 오자서가 주장하는 연제항월(聯齊抗越:제나라와 연합해 월나라에 대항하자는 계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태재(太宰) 백비의 중상모략을 듣고 검을 내려 오자서로 하여금 자결하게 한 뒤, 음력5월5일에 그의 시체를 전당강(錢塘江)에 내버렸다. 오자서는 죽은 뒤 이 강의 신이 되었고, 이후 강소(江蘇)-절강(浙江) 일대의 백성들은 매년 5월5일이 되면 오자서를 위해 제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사 활동이 훗날 단오절 각종 풍속활동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4. 굴원고사설(屈原故事說):

가장 많이 인용되는 유래는 바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유명한 굴원의 고사에서 비롯된 설이다. 굴원(屈原)은 기원전340년 지금의 호북성에서 태어나서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벼슬을 지낸 인물로서, 박식하고 총명하며 고상한 인품으로 존경받았고, 초나라 회왕(懷王)으로부터도 많은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의 굴원열전(屈原列傳)을 보면 “궁에 들어서면 왕과 국사를 논했고 궁을 나서면 손님들을 접대하였다”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초나라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왕의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이를 시기하는 자들도 늘어나는 법, 마침내 그를 시기하는 자들에게 모함을 당하여 면직되고 경성에서 쫓겨나 유배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유배되어 있는 동안 초나라는 진(秦)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참패하고, 이후 굴원은 회왕에 의해 다시 부름을 받게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굴원은 2번째로 유배를 가게 되고 그 사이 초나라 회왕은 진나라에 잡혀가 죽고, 경양왕(頃襄王)이 즉위를 한다. 그 뒤 굴원은 경양왕에 의해 강남으로 3번째 유배를 가게 된다. 결국 굴원은 유배지인 강남에서 비통함에 젖어 많은 시를 남기고 죽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여러 학설이 있다. 즉 굴원은 자신을 시기하여 모함한 무리들에 의해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유배지에서 자신의 결백을 위해 강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 그리고 우국충정에 불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한탄하던 끝에 스스로 물에 뛰어 들었 다는 설이다. 또 한 가지는 유배되어 있던 중 초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하자 이를 듣고 분개하여 기원전 278년 음력 5월5일 62세를 일기로 호남(湖南)의 멱라수(泊羅水: 호남성 상수의 지류)에서 투신자살하였다는 설이다.

 

어쨌든 굴원이 강물에 몸을 던진 뒤,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배를 타고 사방으로 굴원의 시신을 찾았지만 아무도 그의 시신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대나무통에 찹쌀밥을 넣어 강물에 뿌리고 북을 치며 용주(龍舟)를 저어서 물고기들을 쫓아 굴원의 시신을 먹지 못하도록 했고, 매년 음력 5월5일이 되면 대나무통에 찹쌀밥을 넣어 강물에 던지며 굴원의 넋을 기렸다고 전해 온다. 이것이 바로 단오절과 단오절에 중국 각지에서 행해지는 롱조우(龍舟) 경주와 쫑즈를 먹는 풍습의 유래라고 전해진다. 즉 배를 타고 굴원을 찾아 헤매던 것이 용주(龍舟)경주로 발전되었고, 굴원의 시신을 먹지 말라고 물고기들에게 대신 던져주었던 쫑즈를 집집마다 싸서 먹는 풍습으로 확대된 것이다.

 

<단오절의 풍습>

 

1. 싸이롱조우(賽龍舟: 용주 경기)

중국에서 단오절의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활동은 역시 롱조우(龍舟)경주이다.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이 활동은 오랜 시일이 지나면서 국제적인 민간 스포츠로 발전되었다. 롱조우(龍舟)는 용처럼 생긴 일종의 목선(木船)으로 경기를 할 때에는 많은 롱조우(龍舟)가 징과 북 소리 속에서 서로 선두를 다투는데 그 장면이 매우 장관이다. 현재 싸이롱조우(賽龍舟: 용주 경기)는 전 중화권에서 매년 음력 5월5일을 전후해 대대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형형색색의 용모양의 배에 20여명 정도가 함께 세차게 노를 저어 나가고 맨 앞 용머리에 있는 사람이 목적지의 깃발을 빼어들면 우승하는 것이다.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롱조우가 힘차게 물살을 가르면 몰려든 관중들은 열광하고 단오절 축제는 최고조에 이른다.

 

싸이롱조우는 현재 중국의 항주 지방을 비롯해 홍콩, 대만, 싱가폴 등지에서 매년 국제대회를 개최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중화권 뿐만 아니라 필리핀, 일본 캐나다 등지에서도 출전팀이 참가하고 있다. 롱조우는 특별한 설계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숙련된 목수의 경험만으로 제작되며 목수가 배 한척을 완성하는데 45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이 배의 심볼인 용두(龍頭)와 부조는 전문 공예사들의 손을 거치며, 마지막으로 용두에 용의 눈을 그려 넣는 의식을 통해 롱조우는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된다. 생명이 생긴 배는 해안으로 진수되어 3회 전진 후퇴를 반복한 후 비로소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국제대회는 홍콩 스타일과 대만 스타일로 구분되며, 대만스타일의 배가 용두의 크기가 더 크며 선체도 크고 무겁다. 국제경기에서는 홍콩스타일이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한편 2001년 4월29일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코스로 장강삼협 76KM 종단 국제경기가 열려 크게 이목을 끌기도 했다.

 

2. 쫑즈먹기

단오절에 중국인들은 다른 음식을 만들지 않고 주로 쫑즈를 먹는다. 쫑즈역시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된 음식으로서, 찹쌀 반죽 안에 대추, 버섯, 고기 등의 속을 넣고 대나무 잎에 싸서 쪄낸 음식이다. 이 풍습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멀리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도 보급되어 있으며, 대륙식(북방식), 홍콩을 비롯한 광동식(혹은 객가식), 대만식이 있고 조금씩 특색을 지니고 있다. 북방식은 일반적으로 찹살 반죽 안에 대추를 넣어 대나무 잎으로 싸서 쪄내는 식인데, 대만식이나 객가(客家)식은 버섯이나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등 다양한 속을 넣어 만든다.

 

3. 악귀 쫓기

한편 대만과 홍콩 등의 남방지역에서는 쫑즈를 먹고 롱조우(龍舟) 경기를 거행하는 외에도 슝황지우(雄黃酒:웅황주)마시기, 향주머니(香包) 걸기, 창푸(菖蒲:창포)꽂기, 아이차오(艾草:쑥) 걸어 놓기 등을 하며 악귀를 쫓고 건강을 기원하는 독특한 풍습이 있다. 쑥과 향주머니 걸기: 남방지역은 음력 5월정도 되면 매우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전염병이 도는 일도 꽤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사악한 기운을 피하고 건강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문에 쑥과 같은 약초를 걸어 놓거나 향료가 들어 있는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샹빠오(香包: 향주머니)를 걸거나 몸에 지니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샹빠오는 물고기, 용 등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작은 인형이나 등(燈)과 같이 생겼는데 안에는 중국향이 들어있어 걸어놓거나 몸에 지니면 향기가 난다. 이 향기는 벌레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악귀를 막아주는 의미라고 하며, 무더위에 이를 몸에 지녀 건강하고 또 행운이 있으라는 뜻이다.

슝황지우(雄黃酒:웅황주) 마시기: 슝황(雄黃)이란 일종의 광물질로서 이를 쌀로 만든 술에 탄 것이 바로 슝황지우이다. 슝황지우는 질병을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단오날 마신다. 단 이를 많이 마시면 안되며, ?低걋甄? 마시지 않고 대신 이마에 슝황지우를 찍어서 王고자를 써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창푸(菖蒲:창포)꽃기: 창포는 악귀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고 생각해서 단오날 이를 문앞에 꽃아 놓는다.

 

한편, 같은 동양 사회인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단오절이 일년 중의 중요한 세시풍속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절을 ‘수릿날’ 이라고도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우선 이는 한자어의 술의(戌衣)에서 온 것으로서, 그 의미는 신(神), 상(上), 고(高)를 뜻하며, 상일(上日), 신일(神日)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모내기를 끝내는 5월이면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주와 가무를 즐기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으로서의 의미인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단오절에 즐겨 먹는 음식인 쑥떡을 수레바퀴모양으로 만들어 먹었던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단오절에 우리나라에서 즐겨하는 활동으로는 그 지방의 향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

 

우리나라의 단오는 북쪽지방으로 갈수록 강해지고 남쪽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그 행사가 약해져 대신 추석을 중요시하게 여겨왔다. 즉 단오는 양(陽)의 기운, 추석은 음(陰)의 기운과 관계되었던 것이다.

 

중국사람들은 창포를 문에 꽃아 나쁜 기운을 예방한다지만, 우리네 부녀자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창포를 이용했던 것 같다. 창포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에 윤기가 돌고 소담해진다고 해서 이를 즐겨 했고, 또 몸에 좋다하여 창포 삶은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과 비슷하게 역질(疫疾)을 예방한다 하여 단오절에 호리병박이나 작은 인형을 만들어 허리에 차기도 했으며, 몸에 부적을 만들어 지니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날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강한 날이기에 그 중에서도 가장 왕성한 오시(午時)를 기해 어머니에게 이롭다는 익모초를 뜯어다 즙을 내드리는 효성스런 풍속도 있었다.

 

 

♣ 성년의 날과 성인식

 

의 의

- 성인으로서 자각과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 주고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 격려

- 국가사회가 바라는 유능한 인재 양성을 위한 바른 국가관과 가치관 정립

 

유래 및 연혁

 

◆ '삼한시대 마한에서 소년들의 등에다 상처를 내어 줄을 꿰고 통나무를 끌면서 그들이 훈련받을 집을 지었다'는 성년식에 관한 기록과 '신라시대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관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문헌상 확실히 나타난 것은 고려 광종16년(서기965년) 에 태자에게 원복(元服)을 입혔다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음.

* 원복: 어른 평상복인 배자(褙子-덧저고리)를 입음.

 

◆ 성년례(成年禮)는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중류 이상에서 보편화된 제도였으나 조선말기의 조혼 경향과 개화기(단발령)이후 서서히 사라짐.

- 1973. 3.30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 규정

- 1975. 4.28 기념일자 변경(4.20 → 5.6) ※ 5월은 청소년의 달

- 1984. 9.22 기념일자 변경(5.6 → 5월 셋째 월요일)

문화체육부가 주관하여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짊어질 성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을 부여하는 각종 기념행사를 하나, 공휴일은 아니다. 1977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이 날을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하였다. 만으로 20세가 되면 옛부터 젊은이들이 어른이 되었음을 마을 단위로 축하하는 의식을 치루었는데 이러한 전통을 오늘날까지 계승하여 기념하는 날이 바로 성년의 날이다.

 

4대 전통생활의식 관혼상제(관혼상제) 가운데 첫 번째 관문인 전통 성년례는 삼한시대 이전에 유래돼 조선시대까지 면면이 이어져 왔으나 최근 서양식 성년식에 밀려 거의 자취를 감췄다. 1999년 문화관광부는 청소년들에게 전통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의식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삼기 위해 표준 성년식 모델을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문화관광부는 이번 표준 성년식 모델개발을 계기로 해마다 성년식을 치르는 기업체와 학교, 기관 등에 이를 널리 보급해 전국적인 행사로 활성화시킬 방침이다. 표준 성년례는 참가자 모두 전통관례복장을 갖추고 의식을 주관하는 어른인 '큰손님'과의 상견례에 이어 '큰손님'의 교훈말씀인 '삼가례'와 성년에 이른 청소년에게 술을 내리는 '초례',그리고 성년선언 등으로 이어진다.

 

성년식 成年式

 

성년의 날인 5월 셋째 월요일에 행하여진다. 의식이라고는 하지만 실상 직장에서 이 날을 기해 20세가 된 사원을 격려하는 모임을 가지거나, 성년이 된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자축하는 정도이다. 성년의 날이 제정된 것은 1973년의 일이지만, 전통적인 성년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와 계례(몄禮)는 중국의 예교(禮敎)가 들어온 이후 상류계급에서 널리 행하여졌다. 관례는 성인이 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남자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것이고, 계례는 여자에게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것인데, 이들 행사에는 복잡한 의식이 따랐다. 남자는 관례의 절차를 마치면 아명(兒名)을 버리고 평생 쓸 이름과 자(字)와 호(號)를 가졌으며, 결혼할 자격과 벼슬길에 오를 권리도 갖게 되었다.

 

《문공가례(文公家禮)》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10세가 지나면 이미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관례도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년식은 지금처럼 20세로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들이 20세를 성인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은 투표권과 관련하여 20세에서 18세로 낮추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나이와 관계 없이 결혼을 하면 성인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15세 이상 되는 소년 소녀들에게 자기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을 주어 법률행위를 할 수 있게 하였다.

 

 

 

★ 5월18일 광주 민주화운동

 

1980년 5월에 광주지역에서 비롯된 민주화운동.

광주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도 한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발단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특히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야 말았다.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했다.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2)전개과정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해서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태우는 등(편파방송 때문)시위가 격해졌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진상을 전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21일에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이 날 오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했고,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하며 시민궐기대회를 열어'계엄 해제', '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했다.

 

이 자치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사태 수습을 둘러싸고 시민군 지도층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타협하자는 쪽과 정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구속인사석방,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결사 항전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통신*교통을 단절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21일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8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627명이 구속되었는데,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1981년 4월에 특별사면 및 감형으로 모두 풀려났다.

 

(3)영향

신군부 세력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선 전두환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았다.

또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반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대학생들은 몇 차례에 걸쳐 미문화원을 점거,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었다.

 

1988년에 노태우정부가 들어선 뒤 정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받았고, 사건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책임자들을 구속하고, 사망*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정해졌다.

 

 

 

♣ 발명의 날(5/19)

 

대한민국 기념일 중 하나로 발명사상 및 과학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기념일. 매년 5월 19일이다.

 

우리 민족은 500여년 전부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측우기. 거북선 등을 발명하였는데, 이러한 민족의 우수성과 선조 때부터 계승된 발명사상과 과학정신을 앙양하여 발명 의욕을 촉진. 장려하고 보호 육성함으로써 기술의 진보 발전은 물론, 국가 산업 발전에도 이바지할 목적으로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1957년 5월 19일 상공부가 제1회 발명의 날 기념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제19차 국무회의에서 5월 19일을 발명의 날로 정한 것은 장영실의 측우기의 발명일이 1442년(세종 24) 5월 19일인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발명의 날 행사는 그 후 1970년대 초반까지 매년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으나, 그뒤 정부는 각종 기념일들을 통폐합하여 1973년 7월<<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는데 이에 따라 다음해부터 발명의 날 행사를 따로 갖지 않고 3월 20일로 지정된 '상공의 날 행사에서 발명사상의 함양을 위한 행사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1982년 5월 19일에 제17회 발명의 날 행사를 한국발명특허협회의 주관으로 다시 개최하였고 한동안 민간 주도로 행사를 진행하다가, 1994년 발명진흥법에 따라 한국발명특허협회가 한국발명진흥회로 명칭을 변경해 계속 행사를 주관하던 중, 1999년부터 법정 기념일로 채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사의 주요 목적이 발명의 중요성을 전 국민에게 인식. 제고시키는 데 있는 만큼, 해마다 전국발명진흥대회에서 우수한 성과를 올린 사람과 발명진흥과 특허기술 개발에 큰 공이 있는 기업인들에게 산업훈장과 대통령표창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상공부장관. 상공회의소 표창 등 각종 표창과 상품을 수여한다.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로서는 과학기술 진흥과 발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고 이에 따라 발명사상의 함양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 국》: 매년 5월 25일

1991년 9월 17일 우리나라의 유엔가입과 함께 다각적인 국제협력 사업에 따라 각종 방재정책 기능강화 필요성이 인식되어 1990년 IDNDR(국제 재해경감 10개년 계획)에서 권고된 세계 재해경감의 날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1994년부터 재해 예방적 차원에서 우기철 이전인 5월을 재해예방법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높이고, 방재훈련 등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제정하였으며, 1995년 자연재해대책법 전문 제정에 따라 법적(자연재해대책법 제23조)으로 명시하였다. 주요행사 내용으로는 방재행정세미나, 방재시범훈련, 재해 예방 캠페인, 재해위험지구 및 방재시설 점검·정비, 재해참상 및 복구관경 사진전시회, 재해예방 포스터 공모전 등 행정자치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유관기관 등에서 다채로운 재해예방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차는 소만(小滿)(5/21)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며, 양력 5월 21일 정도가 된다. 해가 황도 60도의 위치에 올 때인데 만물이 점차 자라서 가득 찬다(滿)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부터 여름 기분이 나기 시작하는데 보리가 익어가며, 산에서는 부엉이 소리가 정겹다. 또 '보릿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내남없이 양식이 떨어져 어렵게 지내던 때이다. 옛날에는 소만부터 망종까지의 시기를 삼후(三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후(中候)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가며, 말후(末候)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 씀바귀는 꽃상추과에 속하는 다년초로서 뿌리나 줄기, 잎은 이 시기에 식용으로 쓰였다.

 

또 이때 즐겨 시식하는 냉잇국은 시절식으로 이름이 높다. 초후를 전후하여 죽순(竹筍)을 따다 고추장이나 양념에 살짝 묻혀 먹는다. 보리는 말후를 중심으로 익어 밀과 더불어 여름철 주식을 대표한다. 온 천지가 푸르름으로 뒤덥혔지만 대나무만큼은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다. 이는 새롭게 탄생하는 죽순에 자기의 영양분을 공급해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미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에게 정성을 다하여 키우는 것과 같다 하겠다. 봄의 누래진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대나무 가을)이라 한다.

 

 

♣ 부부의 날 법정기념일(5/21)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공동대표 권영상 송길원 하충식)'는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에 관한 청원'이 지난 12월 1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에 따라 행정자치부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고쳐 부부의 날을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처럼 법정기념일로 제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올해부터 시행될 부부의 날은 공휴일은 아닙니다.

이 청원을 주도적으로 맡아온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의원은 "가정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건강한 가족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부부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부의 날 위원회는 1995년부터 '건강한 부부와 행복한 가정은 밝고 희망찬 사회를 만드는 디딤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에서 매년 5월 21일 '부부의 날' 행사를 개최했으며 2001년 4월 청원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