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床短想 7.] 해 뜨는 시간이 인식의 흐름을 자각하게 한다.
[病床短想 7.] 해 뜨는 시간이 인식의 흐름을 자각하게 한다.
다시 잠을 설치고 말았다. 며칠째 반복되는 심연으로부터 튀어나온 것 같은 깊고 아득하며 견고한 악몽의 뿌리...교통사고의 순간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죽음에의 자연스러움이 아닌 느닺 없음이 주는 고통으로서의 상실감의 實在...
경험으로나 이론으로나 그 원인을 사고의 순간에서 겪은 죽음이 공포로 다가 온 정신의 일탈에 대한 극도의 상실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은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건만, 잠재의식에서는 교통사고의 순간에 경험한 그 생명의 단절에 대한 공포의 절대적 상실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내게 생긴 이 일을 내가 너무나 생소하게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 위에서 또 다른 내가 웅크리고 울부짖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잠을 빙자해 꿈속으로 헤집고 나타난다.
급기야는 조금 전 새벽에 혈압을 체크하러 온 간호사가 탈진해서 눈을 뜨지 못하는 내게 정신과 상담을 권한다. 사고 후유증으로 이런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단다. 수면제 처방도 권한다. 오늘 지나고 보자고 간호사를 돌려보내고는 나를 마주 하기 위해 항상 하는 습관처럼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연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내가 겪은 교통사고가 현대 사회에서 수 없이 많이 나타나는 도구의 발달이 가져 온 문화적 충격의 일부임을 납득하고자 한다. 아침 해가 빗속으로 부터 다가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수히 난 문화의 오솔길들이 거대한 네트워크, 그러나 변증법적 하나로 통일된 네트워크가 아니라 여백과 탈구를 매개로 한 리좀을 형성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저항세력의 결집이 가능한 문화의 흐름 앞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기술의 이기적 사용으로 인한 혜택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기술의 이기적 속성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때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기계적 단순한 운동에서 벗어나 공간과 시각의 영역을 확대하며 무한 속도를 지향하고 기술의 발전이라는 대표적 결집체로 성장한다. 오늘날 자동차는 거리를 이동시켜 주는 인간이 조작하는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그 창조자인 인간을 전혀 다른 공간과 시간 속으로 이동시켜 놓고 인간의 다음 이동의 미래를 지배하며 인간 스스로 만든 기계에 인간이 의존하게 하는 기계 그 이상의 생명체로 진화해 왔다.
15세기의 증기자동차에서 오토의 가솔린자동차...다임러와 벤츠. 포드, 무스탕, 폭스바겐...현대에 이르러 인간 기술의 결집체로 성장한 수 많은 자동차들은 미래에는 항법 우주자동차로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라 할 것이다.
현대 생활과 자동차는 이렇게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전자와 정보처리기술의 발달로 기관 및 섀시의 전자 제어, 도로 안내장치, 졸음 운전방지장치에서 더 나아가 무인조종 자동차까지 연구하기에 이르러 지능을 갖추고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인다는 인공지능의 개념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또한 이동통신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차 안에서의 생활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차량을 움직이는 사무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편리함의 극치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현대인들은 자동차에 대한 투자와 소유를 욕망한다.
이제 사회를 형성하는 대중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기술의 발전을 미래적 가치로 계승 승화시키려는 시도는 일련의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상위 계급으로 대중이 형성되어 계속 미래의 모습을 바꾸려고 한다. 반면 매일 수를 셀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 사고 속에서 현대인의 탈의식화를 염려하면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기계에 노예화 되어 가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일연의 문화적 지성인과 그들의 정신적 생산물을 문화 행위로 공유하는 깨어나는 대중으로 대치시켜 놓는다.
한 사회의 건강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대중이 결정한다. 독재자도 민주투사도 역사를 궁극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역사의 마지막 劇場은 대중들에게 있다.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사회에서 기술이 가져 온 권력과 자본, 대중매체에 의해 식민화된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세계 전체를, 삶 전체를 보는 눈을 주는 것이다.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 촉촉한 정서를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각종 인문적 교양, 그리고 우주와 역사 전체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갖춘 그런 인간, 정말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그런 인간. 대중 전체가 그런 인간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그리하여 편리함에 익숙하게 하는 모든 기계적 발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의식을 꿈꾸게 하고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혼돈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인문정신의 촉촉한 내적 자기 치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생명문화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중들에게 ‘의식’을 심어주는 각종 재야 강의실, 거대한 기술자본의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고독한 문화戰士들, 전문가로서 각자의 영역을 개혁하려고 애쓰는 지식인들…. 작지만 넓게 퍼져 있는 이 게릴라들이 사안에 따라 역동적으로 연대를 이루고 또 해체되는 길항 작용이 21세기의 생명으로서의 정신운동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치는 동안 새벽내내 무기력해진 의식이 곧추 세워진다. 복도에서는 이른 아침을 나르는 병동 식사도우미들의 발걸음과 목청이 울려온다. 다시 새로운 아침이다. 아니 새로운 아침으로 시간을 깨울 순간이다. 죽음을 고통에서 새로운 삶으로서 인식해야 할 시간이다. 해 뜨는 시간이다. 밥을 먹을 시간이다. (강미/변산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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