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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특강]한국의 진보정치의 세력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보정당 정체성에 대해 /1강

변산바람꽃 2012. 5. 16. 09:54

 

 

 

[리포트 특강]

 

=한국의 진보정치의 세력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보정당 정체성에 대해 /1강=

 

 

 

진보정당을 배제한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진보정당의 정치세력화는 이미 설 땅이 제한되어 있다는 구조적 문제에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최근에 우리사회에 충격으로 다가 온 진보정당인 진보당의 내분에 의한 폭력적인 사태는 정당체제에서 노동에 근간한 태생적 환경과 그 태생이 자유주의 정당의 통합이 가진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둘의 경우 모두 자기 생존을 위한 이념적 경험은 쌓였으나 정당으로서의 민주적 절차와 정치행위를 위한 민주적 선택의 경험, 그리고 진보정당으로서의 토양을 어디서 구현할 것인가의 목적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서 이미 예견된 분열일 수 있다.

 

<진보와 야만>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은 연대기에 따라 20세기 역사를 기술하는 일반적 서술방법을 벗어나 <진보와 야만>을 국제사와 국내사적으로 20세기를 주제 별로 들추어내듯이 기록했다. 그는 이를 위해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중심부와 반주변부와 주변부 사람들에게 미치는 고통의 크기, 생산력과 환경 피해의 격차, 무역이 증가하면서 발생하는 경제와 사회적 불평등을 비교해서 살펴보고 있다. 또한 국가 간의 제국주의 경쟁과 그로 인해 유발된 식민지들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의 원인을 추적하고, 중심부가 설정한 국가와 허구가 지배하는 민족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투쟁과 전쟁을 짚어본다. 중심부는 중심부대로, 반주변부와 주변부는 그들대로 국가 간 벌어지는 욕망과 갈등은 진보를 위한 피치 못한 투쟁이라기보다 끔찍한 야만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저서에서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국가 간 경쟁이라는 명분에서 자행되는, 국가의 이름으로 간섭되는 다양한 형태의 야만적 행위가 진보라는 명분으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것을 오늘날 한국의 정당정치에 비교해 보고자 한다. 결국은 집단이든 개인이든 더 많이 갖고자 하여 나타나는 욕망과 갈등이 진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의 투쟁이라는 입장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의 진정성은 투쟁에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조화로운 삶의 연장선상에서 현대 사회 시민들의 삶에 내재될 수 있도록 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 왜 보수이면 되는 것이 진보이면 안 되는 것인가?

 

학생이지만 여러분도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최근 며칠 간 우리나라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진보당내의 총선 후 패권강화에 따른 계파 간 갈등으로 빚어진 것처럼 나타난 사태를 들었을 것이다. 당권파다 비당권파다 계파를 나눈 것은 내부에서의 편가르기에 의한 결과이기 보다는 외부의 시선에 의해 인위적으로 불리워진 경향이 더 크고 아직 나로서는 그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확신할 수 없기에 여기서 서로 다른 계파라고 표현하겠다.

 

비록 다른 정치적 목적과 정당으로서의 진보당에 대한 다른 기득권 확보를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어찌 되었던 공당의 대표를 물리적 방법으로 폭행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언론에 의해 보도되면서 그 사태에 대한 충격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국민의 시각에서는 진보정당의 간판 아래에서 벌어진 타협과 조화를 모색하는 정치적 노력이 실종된 폭력적인 상황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회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국회 내의 정당 간 싸움 현장을 본 그동안의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보적 가치추구를 표방하는 진보당 내부에서 가장 비민주적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것에 대한 환멸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보수정당은 내부적으로 싸워도 집안싸움이니까 비켜가는 보편적 시각이 우리에게 있는 반면, 진보정당의 싸움은 같은 양상이라도 진보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보편적 잣대가 마치 내재된 희망처럼 현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즉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에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잣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사회에서는 정당의 내분에서 나타나는 현상도 보수면 관대하고 진보면 세상이 뒤집어진 것처럼 요란스럽게 반응하는 걸까?

 

 

2. 진보정당을 들러리화 한 한국의 정당정치의 한계

 

그간의 한국정치는 ‘진보이념과 진보정당이 배제되어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정치의 ‘보수적 민주주의의 기원’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이유로 ‘냉전반공주의’, ‘권위주의적 산업화’, ‘민주화 이행의 보수적 종결’과 ‘지역주의’가 구조적 요인을 이루어 야기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로 인해 한국 정당정치는 진보정당이 줄곧 배제되어온 체로, 보수 독점적 혹은 소위 민주당 중심의 카르텔 정당체제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냉전과 분단이라는 국제정치적 현실과 정권의 체제정당성 확보차원에서 조장되기 시작한 ‘냉전반공주의’는 정권을 갈아타면서 그 명맥을 유지되어 왔다.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그리고 지금의 민주화 시기까지 냉전반공주의는 정치적 공간과 이념의 지형의 협소화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과(연관된 내용을 마지막 장에 해제로 올린다.) 같은 정치적, 제도적 장벽을 형성하면서 철저하게 진보정당의 진입을 막아왔다고 볼 수 있다.

 

‘냉전반공주의가 보수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것은 냉전반공주의의 내용 자체가 보수적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이념성을 수반하는 정치, 사회적 조직화를 허용하는데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직화의 시도가 노동문제나 계급불평등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혹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수정하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 정책이나 프로그램, 이념과 연계될 때 이내 이데올로기적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은 다만 보수주의 세력일 수밖에 없었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3, p. 64.) 는 견해에 나는 공감한다.

 

역사적인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정치는 진보정당의 진입배경이 될 수 있는 ‘진보 대 보수’의 정치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체, 또다시 3김으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균열구조 속에 함몰되고 만다. 또한 민주화 이행 과정이 보수적 기득권세력에 의해 주도된 결과, 정치권의 ‘선택과 배제’의 논리 속에서 채택된 각종 선거 및 정치제도들은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하여왔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요인을 극복하고 드디어 지난 17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원내지출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87년 민주화의 ‘보수적 이행’과 이후의 ‘지역주의’ 균열구조 속에서 실현되지 못했던 ‘진보 대 보수’의 새로운 정당체제의 출현에 대한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의 민주적 변화의 과정이 도래했다는 것을 진보정당이 기존 정당체제에 합류할 수 있는 동기라고 볼 수 있는지 기대감만큼 기득권적인 보수정당과 개혁을 표방한 자유주의 민주정당이 기득권을 양분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형태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 대 보수의 모습 실현이라고 볼 수 있을 지 살펴 볼 일이다. 우리 사회의 내부에 기층 국민의 삶의 질 안에서 이러한 민주화로의 이행이 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서 진보정당의 토양이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화의 결과물로서의 진보정당의 출현이 가능했던 것뿐만 아니라 한국의 보수화하는 정치와 경제 권력이 만들어 낸 그들 입장에서의 필요악의 존재성에 대한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현재의 이명박정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책들과 그로 인한 우리 사회의 극대화된 차별에서 그 이유를 예로 들 수 있다. 야만의 극치였던 나치즘과 파시즘은 단지 과거사가 아니다. 중심부든 반주변이나 주변부든, 권력을 쥔 자들의 욕망을 위한 독재와 그로 인한 불평등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참다못한 혁명세력이 민중의 환호를 받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파시즘으로 귀결되고, 민주주의는 요원하기만 했다.

 

지난 87년의 민주화의 결과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치루어 온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중심부에서 반주변부로 민주주의는 조금씩 자리 잡는데 기여한 동기였고, 그럼에도 자본을 매게로 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갖는 사회 계층내부의 주변부의 민주주의는 여태 시행착오가 끝나지 않았다. 이는 차별과 억압을 넘어 끔찍한 제노사이드까지로 이행하는데, 이는 <진보와 야만>의 저자 클라이브 폰팅이 예견한 진보의 탈을 쓴 인간의 야만으로 볼 수 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이러한 야만적 비민주적 요소가 여전히 기득권을 위한 들러리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진정한 진보의 토양이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진보정당의 생존과 역할은 단지 노동을 매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층 민중의 토양에서 기초되어야 한다.

 

( 다음 회에서 계속...)

 

 

 

- 인용자료 -

클라이브 폰팅, '진보와 야만', 김현구 옮김, 돌베게 펴냄.

임지현, ‘한국의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건설에 관한 연구’,「한국사회과학」, 23-1호

장 훈, ‘카르텔 정당체제의 형성과 발전: 민주화 이후 한국의 경우’,「한국과 국제정치」, 2003년 (겨울)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3, p.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