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이야기 4.] 드디어 감자가 주식이 되다.
[감자이야기 4.] 드디어 감자가 주식이 되다.
이제 감자 없는 아일랜드 식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감자가 주식이 되었던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18세기초까지만 해도 감자는 보조 음식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 40년이 지나도 아일랜드 어느 곳도 감자를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주식은 귀리와 빵이었다. 감자는 식량이 부족한 겨울이나 곤궁할 때나 먹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1740년대 들어 감자가 처음 도입되었던 먼스터 지방에서만 주식으로 대두되었을 뿐이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빈민이나 먹는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풍문에 따르면 돼지조차도 감자를 먹지 않고 곡식이나 너도밤나무 열매 혹은 음식 찌꺼기를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자의 중요성은 두드러지게 대두되고 있었다. 재난이 닥치자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났다. 1728년에서 29년까지 발생했던 기근으로 수천 명이 굶어 죽었는데 바로 귀리 흉작이 그 원인이었다. 감자만으로는 부족한 음식을 보충할 수 없었다. 1740년에서 41년까지 발생했던 기근은 훨씬 더 가혹했다. 이 해는 유난히도 추워 저장해둔 감자(감자는 구멍을 파 마당에 저장했다)가 겨울 서리에 얼어 버렸고 귀리 수확도 형편없었다. 기근과 질병이 온 나라에 만연해 길가마다 시체가 쌓여갔다. 이 때 기근으로 죽은 사망자 수는 전국적으로 20만 명에서 4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수였다. 18세기 아일랜드에서 발생했던 최악의 재난이었다. 대기근을 빼면 여기에 필적할 만한 재난은 없었다.
18세기에 발생한 두 번의 기근은 농사 주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점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수확량이 나쁘고 곡물을 보존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예외 없이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 흉년이 들고 예비해둔 식량마저 떨어진다면 귀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두 달 동안은 혹독한 생활을 견뎌야 했고, 다음해 감자를 파종할 때까지 또 여섯 달을 견뎌야만 했다.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감자로 이런 힘든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지역에 따라 감자에 대한 대우가 달랐는데 남부 지방은 북부 지방에 비해 일찍부터 감자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780년경이 되어서야 감자가 처음으로 아일랜드의 주식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어떤 지역에서는 감자가 더디게 알려졌고 어떤 지역에서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감자가 돼지를 키웠다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식습관은 변화하는 농경 경제에 잘 들어맞았으며 특히 돼지 사육의 증대를 가져왔다. 18세기 쇠고기와 버터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아일랜드는 오래 전부터 수출용 가축을 사육해왔다. 1735년 이후 방목지는 십일조를 면제받는다는 관행이 정착되어 육우 사육은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가축 사육은 가장 점잖은 사업이었고 농사일에 비해 모양새나 대접도 좋았다. 농부들은 많건 적건 돼지 사육용으로 곡식이나 감자를 재배했고 유장도 생산했다.
돼지와 젖소를 같이 사육하면 좀더 안전을 기할 수 있었다. 돼지는 사람이 먹는 우유와 감자로 키울 수가 있었고 돼지의 배설물은 감자밭에 거름으로 쓸 수 있었다. 초지나 돈이 없어 젖소를 사육할 수 없는 경우에도 돼지는 사람이 먹다가 던져준 감자나 감자껍질로 기를 수 있었다.
(5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