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短想 / 재수록] 현상과 본질에 대해
[논술 短想 / 재수록] 현상과 본질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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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사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 같았다. 그러나 거사는 아침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한 거울을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맑은 거울 속에 비친 추한 얼굴을 보기 싫어할 것인즉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깨쳐 버릴 바에야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 있는 것입니다. 만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이를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
하니,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규보 <경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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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Gestalt) 심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논의 중 이른바 ‘착시’라고 불리는 현상들이 있다. 검정 바탕의 회색은 흰색 바탕의 회색보다 밝아 보이고,
루빈의 컵은 마주보는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거의 모든 인쇄물이 그러하듯,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웹사이트의 모습도 확대해 보면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운 수많은 픽셀들의 조합이고, 우리가 보는 영화도 착시 효과에 기댄 수많은 정지 장면의 연속이다.
게슈탈트(Gestalt)는 ‘사람마다 다른 방법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며, 루빈의 컵을 볼 때 지각을 결정하는 요인은 그 사람의 지각적 습관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는 ‘어떠한 물리적 현상도 목적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모든 정신 현상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라고 한 브렌타노의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까닭은 우리의 의식이 기본적으로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웹페이지를 볼 때 만일 동일한 사이트 내에서 페이지를 이동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페이지 구성의 통일성, 연속성, 유사성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웹사이트의 인터페이스는 이를 기본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식탁 위의 접시가 완전한 원으로 보이는 경우는 없는데 어떻게 원으로 지각할까?
왜 흰종이는 그 위에 붉은빛을 비추더라도 하얀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사물을 서로 다르게, 혹은 사실과 다르게 보는 것일까?
본다는 것은 눈이 보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은 눈만 가지고는 볼 수 없는 대상들을 본다.
그러면 현상과 본질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사전적 의미로 `현상’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형상이고, `본질’은 사물의 현상 뒤에 있는 실재라 한다. 그리고 현상과 본질은 반대되는 개념이라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이 두가지는 서로 별개의 것일까?
비가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흔히 구름이 생성되어서 비가 내린다고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구름의 근원은 어디인가? 지상의 물이 증발되어 구름이 되고 그것이 비가 되어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여기서 지상의 물이 증발하였다고 그것이 영영 되찾을 수 없이 빼앗겨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그것이 순환되어서 다시 지상의 물을 보충해준다. 꽃
이로써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없는 그 자체로 남는 것이다.
(강미/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