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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페북斷想 ] 박영근 시인의 `길`에서
변산바람꽃
2018. 9. 20. 17:24
[페북斷想 ] 박영근 시인의 '길'에서 ------------------- 수업이 한 타임만 있는 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수업 하기 싫어서 그 수업을 다른 날로 연기해 버리고는 씻지도 먹지도 않고 자다 깨다, 일어났다 누었다 하며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의 젊은 지도자와 백두산 천지에 오른 뉴스를 보다가 누었다 그렇게 비가 내린 날의 절반을 보내버렸다. 아침부터 많지도 적지도 않게 혹은 맞기도 맞지 않기도 어렵게 비가 내린 탓이라고 하자. 아직 가보지 못한 박영근 시인의 시비가 있는 부천행을 계획했다가 그만 그도 포기해 버렸다. 다 이도 저도 아니게 내린 비 탓이라고 하자. 늦은 아침이거나 늦은 점심인 것쯤 챙겨먹고는 비 개이고 눅눅한 학의천으로 나왔다. 학의천에는 아직 가을이 완연하게 들어서지 않은 것일까. 가을도 아닌 것이 여름도 가지 않은 것이 비 내린 흔적따라 흐르더라. 학의천 따라 만들어진 좁은 길을 걷는다. 만들어진 길. 그런 길은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그런 길에는 가운데가 없다. 도대체 길 가운데라는 것이 있기나 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길은 그냥 길이거나 아니거나 그래야 하는 원칙도 없고. 학의천 물길에도 길이라는 것은 없다. 흐르거나 덜 흐르거나...걸을 수 있거나 없거나 걸으면 길이다. 애초에 가운데 길이란 없는 것인지도. 나는 내 앞의 길만 길인 줄 알고 때론 휘저으며, 때로는 갈짓자인지 똑바로 가는건지 모르고 걸었는데...도통 길 가운데라는 중심을 찾지 못했는데...그런 내 앞의 길을 박영근 시인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서 보았거나 찾았던 것일까...그래서 그의 세월은 그렇게 아낌 없었고, 그렇게 속절 없었고, 그렇게 순식간에 거두어 버릴 수 있었던 걸까. ------------------------ 길 / 박영근 장지문 앞 댓돌 위에서 먹고무신 한 켤레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흙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거기 먼저 와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저 눈 벌판도 덮지 못한 내가 끌고 온 길들. ------------------------------ 시인에게 길은 앞서 걷는 길이 아니라 미끌어 메어 끌고 온 길이었나 보다. 시인보다 먼저 와서 발치에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었나 보다. 그래서 시인의 걸음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자기의 그 순간들을 하나씩 거두며 걷느라 무거웠고 그래서 단호했나 보다. 오늘은 박영근 시인의 흔적을 만나러 갈까 하다가 그에 그의 시집 하나 달랑 들고 비 개인 천변을 어슬렁 거린다. 날 저물어 오려나. 천변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빛은 혼란스러운 낯빛으로 어둡고, 작은 돌뭉치에 걸터 앉은 내 생의 무게는 참 허접하고 가볍다. 그러니 도무지 내 앞의 길은 어차피 탁하니 이제는 내 앞의 길을 굳이 찾아보지 않기로 한다. 걷다 멈추거나 걷다 걷다 내려 앉는 길이 내 길이라고 하자. 길의 중심을 찾아 달라질 것이 무엇 달라겠는가. 기껏해야 나를 보고 나보다 먼저 울음을 터트릴 지 모를 길일테고 바라보면 불편하긴 마찬가지.---- ---------------------------- 저 꽃이 불편하다 / 박영근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 |
출처 : 재즈 소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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