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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이야기 11. - Wagner - Opera Walkure Der Ring des Nibelungen -발퀴레-

변산바람꽃 2009. 4. 14. 12:53
바그너 - 오페라 -발퀴레- 
「내가 이제까지 쓴 어느 것 보다도 아름답다, 그러나 나를 아주 초췌하게 만들었다,」바그너는 「발퀴레」의 작곡을 끝마친 1개월 후인 
1856년 4월에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쓴 적이 있다,「발퀴레」는 분명히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아름다운 작품이며, 따라
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발퀴레」전 4부 작으로 된 연작신화극(連作神話劇)「니벨룽의 반지」의 하나지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이외의 무대
에서 단독으로 상연되는 기회가 가장 많다, 그 이유는 웅장한「발퀴레의 기행(騎行)」, 부성애(父性愛)의 진정을 토로한「고별의 노래」
「마염(魔炎)의 음악」, 지그문트와 지그린데의「사랑의 2중창」등 뛰어난 음악이 전편에 넘쳐 있기 때문만 아니라 인간 감정의 근본을 이
루는「사랑」이 이 드라마의 기조(基調)를 이루며 그것이 얽혀서 전체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작품은「나를 아주 초췌하게 만들었다」고 바그너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하루아침에 이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성립되기까지
는「니벨룽겐의 반지」4부작의 신화적 기초를 이루는 야콥 그림의「독일 신화」에 달라붙어「탄호이저」의 작곡을 중단할 정도로 흥분했
던 1843년(30세)부터 꼽아서 실로 31년 동안에 걸치는 인간적, 예술적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발퀴레」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니벨룽겐의 반지」전체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를 언급해야 겠다,바그너는 1839년 파리 생
활 때부터 독일의 옛 전설에 대한 흥미를 가졌고 그 뒤에도 꾸준히 그 방면에 대한 연구를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레스덴으로 돌아와서 
지휘와 작곡 활동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고전학, 독일 고대사 등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1835년에 발표된 야콥 그림
의 「독일 신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바그너가 이「신화」를 접한 첫인상은 그다지 명쾌한 것은 아니나, 점점 읽어 가는 동안에 게르만 고대의 신화 세계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의 앞에 펼쳐졌다, 천재만이 가지는 직관(直觀)에 의해 한없는 친근성(親近性)을 느낀 바그너는 왕성한 문학적 창작 의욕에 불타, 중세 
독일의 국민 서사시「니벨룽겐의 노래」에도 등장하는 웅 지그프리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쓸 생각이 떠올랐다, 거기에 아이스퀴로
스의 그리스 비극, 니체의「비극의 탄생」등에서 받은 영향이 얽혀서 그것이 악극의기초로서 정착되었다,
「니벨룽의 반지」4 부작에서 보는 바와 같은 영웅과 신화의 긴밀한 연계는 원래 북구신화(北歐神話)에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오직「일리
아드」에 대한 경도(傾倒)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 게르만 신화의 섭취와 그 독일화, 극화의 작업은 드디
어 북유럽 고대가요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점차 본래적인 독일의 그것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베버에서 이어받은 로맨틱 오페라
라는 테두리에서 제1기의 창작기를 지난 바그너가 다음 시기로 넘어감에 있어서 전인적(全人的) 가치를 가지는 예술에의 발돋움을 위해 거
쳐야 할 진통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첫 성과는 5년 후인 1848년 10월에「지그프리트의 죽음」이라는 산문 원고(散文原槁)가 되어 나타났다, 이것은「니벨룽의 반지」가운
데「신들의 황혼」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것이 다음 달에는 자유율(自由律)을 가진 운문(韻文)의 대화체(對話體)가 되면서 비로소 악극
이 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기억해 둘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지그프리트의 죽음」에서「니벨룽의 반지」4 부작으로의 발전은 큰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것은 이미 앞의 작품에서도 언급했
듯이, 파리 2월 혁명의 여파와 그에 가담한 죄로 국외추방을 당하여 13년 동안이라는망명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체험도 따지고 보면「니벨룽의 반지」4 부작을 창조함에 있어서 겪어야 했던 필연적인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바이마르에 있던 리스트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바그너는 스위스 쮜리히에 정착했다, 바그너는 1850년에 전작(前作) 대본「지그프리
트의 죽음」에 곡을 붙이려 했다, 그리하여 일부 스케치도 했는데 보다 상연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적(前史的)인「젊은 지그프리
트」부터 써야함을 깨달았다[이것이 4부 작에서의 지그프리트],  그리고 이「지그프리트 극」은 다시 신화의 근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라인의 황금」「발퀴레」까지 쓸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52년(39세)말에는「니벨룽의 반지」전체의 대본이 완성 되었다, 
즉 여기까지 이르는 데 9년이 걸린 셈이다,
바그너가 시인에서 작곡가로서의 임무에 착수하기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인데, 일단 착수는 했지만 그 자신의 경제적 위기, 런던
으로의 연주여행, 거기다가 아내 민나와의 불화, 베젠동크 부인과의 관계 등이 겹쳐 좀처럼 진척되지 못했다, 거기다가「트리스탄과 이졸
데」도 착상되곤 해서 4부작은 중단됐다, 이 사이에 바그너는 베토벤을 더 깊게 알게 되고 염세철학자(厭世哲學者) 쇼펜하우어의 저서도 
접하면서 이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그리하여 1854년의「라인의 황금」에 이어 1856년에「발퀴레」의 작곡이 끝났다, 그 뒤「지그프리
트」에 착수했으나 이 4부작이 무대에서 상연될 수 없다는데 절망하고 제3막 중간에서 다시 붓을 던졌다,
1864년 3월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지우(知遇)를 받게 되면서 국왕으로부터의 요청도 있었고, 또 그토록 헌신적으로 뛰어다니면서 
설립에 전력했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도 세워질 전망이 생겨서 다시 분발, 결국 1874년 11월에 이르러 전 4부작「니벨룽의 반지」가 완성
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876년 8월에 독일 악단의 제1급 가수들을 모아 제 4부의 완전 상연이 행해 졌으니, 그 때 바그너의 나이 63세
였다,   
바그너는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사람 이었다, 자기의 이상을 달성함에 있어서는 귀한 생명 까지도 던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물 이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꿈은 태산만큼 컸다, 예술가에게는 몽상가가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러나 바그너
의 경우는 그 거창한 꿈이 99%까지는 이뤄졌던 것이다,

Prelude
Wilhelm Furtwanglerconductor
Sinfonia della Radio Italiana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