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도어를 통해 모두 9장의 앨범, 엘리게이터(Eligator) 레이블을 통해 3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The Messiah Will Come Again>, <Five String Blues>, 닐 영(Neil Young)의 곡을 커버한 <Down By The River>등의 명연을 남기며 당대 제일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로 팬들 뿐만 아니라 동료 기타리스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영국의 기타리스트인 제프 벡(Jeff Beck)은 [Blow By Blow] 앨범에 로이 부캐넌에게 바치는 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수록하기도 했으며, 로이 부캐넌은 <My Friend Jeff>로 제프 벡의 우정에 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업적인 성공을 강요하는 레코드사의 압력과 불화를 빚기 시작한 로이 부캐넌은 점차 술과 약물에 빠져들면서 점차 파멸로 치달았다. 1988년 로이 부캐넌은 술주정을 한 혐의로 수감되었고,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아끼던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뮤지션으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극적인 최후였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아름다운 <Sweet Dream>, 로커빌리풍의 <I Am A Lonesome Fugitive>, <Cajun>과 <Haunted House>, 컨트리 블루스에 재즈적인 맛까지 풍기는 <Hey, Good Looking>등도 좋지만, 역시 본작의 백미는 로이 부캐넌이 연주하는 세 곡의 연주곡 <John's Blues>, <Pete's Blues> 그리고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 될 것이다.
특히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The Messiah Will Come Again>에서의 흐느끼는 듯한 로이 부캐넌의 기타 연주는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아 온 것이다. 전율적인 트레몰로와 애절한 벤딩등의 각종 테크닉을 진한 감성속에 녹여버린 로이 부캐넌의 연주는 그의 비극적인 생애만큼이나 가슴 저리는 아픔을 전달해 준다.
블루스 기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칭송 받고 있는 로이 부캐넌의 빈틈없는 솜씨는 기타라는 악기의 인간적인 면을 직접 생생하게 들려 주고 있다. 좋은 연주는 단순히 손가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감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앨범.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음악 장르를 말하자면 아마 블루스(Blues)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음악으로서의 블루스에는 블루스만의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블루스 음악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수(Singer)의 개념은 없다.
블루스에는 오직 사람과 삶과 고통과 그로부터 빚어지는 연주(Play The Blues)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보컬까지도 연주로 승화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혹자는 "블루스에서는 노래의 기교나 연주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건 블루스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블루스를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절규하거나 포효하는 듯 한 보컬 테크닉과 기타 줄을 목 쪽으로 구부려서 연주하는 '소킹' (choking)같은 연주 기법을 잘 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블루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연주에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루스 연주 기법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블루스의 진정한 감정은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블루스 연주자 중에는 고독과 삶의 고통에 못 이겨 요절한 사람들이 특히 많다. 로버트 존슨, 제니스 조플린, 스티비 레이 본 등이 역시 그랬다. 로이 부캐넌은 어떻게 보면 블루스 뮤지션이라고만 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는 블루스, 재즈, 컨트리, 가스펠, 록앤롤 등 여러 가지 장르의 연주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별로 가는 기차" 운운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지 꼭 100년 후 별까지 가는 급행열차를 스스로 올라 탄 기타리스트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이 부캐넌이었다. 서울 올림픽의 열기로 가득찼던 1988년 8월 14일. 심야방송 DJ가 전해주던 그의 죽음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당시 나이 48세였던 로이 부캐넌은 아내에게 술주정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자마자 자신의 셔츠로 목을 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해 버렸다. 그러나 로이의 그런 죽음 뒤에는 그에게 상업적인 성공을 위하여 그의 음악적 경향과는 상반된 연주를 강요했던 음반사와 에릭 클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 등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대중들로부터는 소외당했던 그의 고독이 함께 했으리라.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음악에 추억이 실렸을 때의 그 무서운 힘을….
[ 리뷰 - WIndshoes ]
Roy Buchanan / 데뷔 앨범 - 로이 부케넌, 미국, 1972년 작품
음반 해설은 전영혁 씨가 담당했다. 해설 속에는 3대 기타리스트가 소개되어 있다. 이 소개 덕분에 나는 에릭 클랩튼 - 제프 벡 - 지미 페이지의 음반을 찾아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리 무어 - 에드워드 밴 헤일런 - 잉위 맘스틴까지 내쳐 듣게 되었다. 그래서 기타라는 악기의 소리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까지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음반은 음악듣기의 선생님 노릇을 담당했다. 예전에 나에게 이 음반을 추천해 주었던 그 레코드점은 없어졌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이 음반을 감상하면, 블루스적인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 음반은 사람을 전율케하는 곡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하나로도 배가 부를 수 있는 음반이리라. 이곡을 들은 현존 세계3대 기타리스트 한명인 Jeff Beck이 감명을 받아 화답곡으로 로이에게 바치는 곡으로 [Blow By Blow]앨범에 수록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를 헌정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세계최고의 무명 기타리스트로 불리우는 로이 부캔넌. 그러나 실은 50년대에 데일 호킨스, 로니 호킨스, 그리고 봅 루먼 등의 로커빌리 싱어의 백에서 활동하여 남부에서는 약간은 이름이 알려져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 음악의 매니아인 롤링 스톤즈가 블라이언 존스의 사망 후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 밴드의 리본 헬룸은 로이의 플레이를 루이지아나 배이라이트 스타일이라고 불렀다. 루이지아나 배이라이트는 오프리와 맞먹는 컨트리 라디오 쑈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 출연했던 제임스 버튼, 프래드 카트 주니어와 동 계열의 스타일을 가르킨다. 플랫 피크와 오른손의 셋째, 넷째 손가락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쵸킹과 치킨 피킹을 혼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연장선상에는 로비 로버트슨이 위치하고 있다. 로이는 88년 8월 14일 음주벽으로 사고 후 수감되어있던 유치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마감했다. (권총자살설과 목메어 자살했다는 의견등이 있음)
국내에서는 특히 그의 곡 중 <메시아 윌 컴 어게인>이 크게 히트했고, 라디오에서도 부캐넌의 곡중 가장 많이 소개 되기도 했다. (본인의 개인적으로는 닐 영의 고전을 리메이킹한 <Down By The River>, <Running Dry>곡이 귀에 가장 걸리는 곡이기도 하다)
1939년 9월 23일 아칸소주 오자크에서 태어난 그는 신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캘리포니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한때 롤링스톤즈의 가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으며, 72년 첫 솔로 앨범 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72년 데뷔 앨범 [로이 부캐넌]을 시작으로 [로이 부캐넌 세컨드 앨범], [댓츠 홧 아임 데어 포], [레스 미], [어 스트릿 콜드 스트레이트], [로딩 존], [유아 낫 어론] 등의 앨범을 계속 발표했다.
72년에 발표된 이 데뷔앨범에는 <메시아 윌 컴 어게인>이 완전히 본작의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이 작품은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컨트리 색이 짙은 앨범이다. 패시 클라인의 <스위트 드림스>, 멀 헤가드의 <도망자> 등 그의 입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표를 찌르는 것이지만 이것들은 흥미 깊다는 점에서 많이 듣는 것이 가능하다.
예을들면 스틸 기타 릭이 인상적인 <도망자>나 5번째 곡에는 제임스 버튼과 맥을 같이하는 프레이즈가 나온다. 특히 전자는 버튼도 녹음했던 것이 있으므로 서로 비교해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여러곳에서 들을 수 있는 로이의 장기인 피킹 하모닉스는 역시 로비 로버트슨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확실하게 <메시아 위 컴 어게인>은 로이를 세상에 알린 명연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들을 수 있는 컨트리 루트를 제외하고는 그를 말할 수가 없다.
[참 조] ▒ ▒ ▒ Tony Joe White - Biography ▒ ▒ ▒
흑인 음악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소울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듯 백인 소울뮤지션들이 나타났는데 이때가 1960년대 초반인듯 하다. "화이트 소울" 혹은 "블루아이드 소울(푸른눈을 자진 사람들의 영혼음악)"이라 불렸던 일단의 백인 아티스트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인데 Blue Eyed Soul은 백인 뮤지션에 의해 불려지고 실연된 Soul과 R&B그리고 Blues를 말한다. 이 용어는 Righteous Brothers같은 그룹이 "You Lost That Loving Feeling"같은 소울 스타일의 노래를 히트 시켰을때인 1960년대 중반 처음 사용되었고 1960대 말을 거치면서, Rascals, Box Tops, Mitch Ryder, Roy Head 같은 뮤지션과 그룹들이 일련의 히트곡을 내자 블루 아이드 소울은 번성하게 된다. 그와 동시대 1960년대 영국에서도 Soul, Blues 음악이 왕성하게 저변이 확대 되어지는데 Blues에 기반을 둔 하드록 그룹 야드버즈, 크림, 레드 제플린, 그리고 에릭 클랩튼, 존 메이올 심지어는 프로그래시브록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 핑크 플로이드까지 그룹명의 Pink와 Floyd는 영국의 백인 유명 블루스 뮤지션의 First Name을 인용하였던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 만큼 영국에서의 "블루아이드 소울"의 음직임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시기였다.
Tony Joe White도 블루 아이드 소울 음악인으로는 빼 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인데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Rainy Day Lover"같은 곡은 남부 작곡가중에 따라올 자가 흔치 않다는 Tony Joe White의 숨은 멋이 있는 그런 곡으로 평가 받고 있다. Tony Joe White has parlayed his songwriting talent into a modestly successful country and rock career in Europe as well as America. Born July 23, 1943, in Goodwill, LA, White was born into a part-Cherokee family. He began working clubs in Texas during the mid-'60s and moved to Nashville by 1968. White's 1969 debut album for Monument, Black and White, featured his Top Ten pop hit "Polk Salad Annie" and another charting single, "Roosevelt and Ira Lee (Night of the Moccasin)." That same year, Dusty Springfield reached the charts with White's "Willie and Laura Mae Jones." Brook Benton recorded a version of White's "Rainy Night in Georgia" that hit number four early in 1970; the song has since become a near-standard with more than 100 credits. White's own "Groupie Girl" began his European success with a short stay on the British charts in 1970.
White moved to Warner Bros. in 1971, but success eluded him on his three albums: Tony Joe White, The Train I'm on, and Homemade Ice Cream. Other stars, however, continued to keep his name on the charts during the 1970s: Elvis charted with "For Ol' Times Sake" and "I've Got a Thing About You Baby" (Top Five on the country charts), and Hank Williams, Jr., took "Rainy Night in Georgia" to number 13 on the country charts. White himself recorded Eyes for 20th Century Fox in 1976, but then disappeared for four years. He signed to Casablanca for 1980's The Real Thang but moved to Columbia in 1983 for Dangerous, which included the modest country hits "The Lady in My Life" and "We Belong Together."
White was inactive through much of the '80s, but worked with Tina Turner on her 1989 Foreign Affair album, writing four songs and playing guitar and harmonica. He released Closer to the Truth a year later for his own Swamp label and toured with Eric Clapton and Joe Cocker to very receptive French crowds (Closer to the Truth has sold 100,000 copies in that country alone). His 1993 album Path of a Decent Groove was released onl y in France, though Warner's The Best of Tony Joe White earned an American release the same year. Lake Placid Blues (1995) and One Hot July (1998) were Europe-only efforts until 2000, when Hip-O Records brought out One Hot July in the U.S., giving White his first new major-label domestic release in 17 years. But White was just beginning to roll, or reroll, as the case may be. The critically acclaimed The Beginning appeared from Swamp Records in 2001, followed by Heroines, featuring several duets with female vocalists, from Sanctuary in 2004, and a live Austin City Limits concert, Live from Austin, TX, from New West Records in 2006. In 2007 White released another live recording, Take Home the Swamp, as well as the compilation Introduction to Tony Joe White. [참 조] ▒ ▒ ▒ Stretch - Discography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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