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ney Bechet (1897 - 1959)
재즈가 탄생한지 대략 30년이 지나기까지 이 음악의 제왕들은 전부 트럼펫 주자였다. 재즈를 창시했다고 불리는 버디 볼덴(1877-1931)이 트럼펫 주자였고 그의 뒤를 이어 재즈를 시카고로 퍼뜨린 조 ‘킹’ 올리버(1885-1938)도 그랬으며 그의 제자이자 재즈를 미국음악으로 정착시킨 루이 암스트롱(1901-1971) 역시 트럼펫을 불었다. 그것은 다분히 재즈밴드의 조상인 브라스 밴드, 다시 말해 고적대(Marching Band)의 전통이었다. 그러니까 행진곡의 특성상 트럼펫 파트는 늘 음악의 주선율을 연주해 왔는데 그러한 경향이 재즈로 옮겨지면서 트럼펫이 음악을 이끌고 여기에 다른 관악기들이 즉흥선율을 더하면서 결국 초기 재즈의 앙상블 형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적대를 브라스 밴드(금관악기 밴드)라고 부르는 것은 초기재즈의 상황에 비추면 그리 엄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뉴올리언즈의 브라스 밴드에는 목관악기인 클라리넷이 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클라리넷이라는 목관악기는 음악을 리드해 가는 트럼펫의 선율 위 에서 고음역의 꾸밈음(obligato)을 즉흥적으로 넣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들 목관악기란 악기구조상 금관악기에 비해 그 성량이 작다.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면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바순 같은 목관악기가 음악의 조용한 부분에서 주로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목관악기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색스(1814-1894)는 금관악기만큼 큰 성량을 가진 목관악기를 개발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완성된 악기가 그의 이름을 딴 색소폰이다. 하지만 이 신생악기는 그가 원했던 교향악단에서의 사용은 물론이고, 재즈밴드에서도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 색소폰이 재즈의 상징처럼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대부분의 재즈 클라리넷 주자들이 색소폰이란 악기에 무관심했다고 해서 이 악기가 초기 재즈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행히도 이 악기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인물이 시드니 베쉐이(1897-1959)라는 천재였다.
이 찬사가 한낱 구름처럼 떠도는 전설로만 남지 않은 것은 4년 뒤에 녹음된 그의 최초 음반들이 바로 증명한다. 1923년 클레어런스 윌리엄스 블루 파이브의 음반 ‘Texas Moaner Blues'에서 베쉐이는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이 밴드의 일원이 되어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즉흥연주의 한판 대결을 펼친 것이다. 물론 이 곡 역시 당시 초기재즈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전체 앙상블을 이끄는 것은 트럼펫이었다. 하지만 관악기 솔로가 펼쳐질 때 이 곡에는 그 이전의 어떤 곡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풍부한 성량의 거친 목관악기 소리가 등장하는데 그 소리는 적어도 이 곡에서만큼은, 놀랍게도 루이의 작렬하는 트럼펫 솔로를 압도해 버렸다. 그것이 바로 베쉐이의 색소폰이었으며(전 생애에 걸친 루이의 수많은 녹음 가운데 그가 솔로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경우는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이 연주자의 능력이자 동시에 자아였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어느 밴드에서든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되길 원했으며 또 그럴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향은, 1923년부터 36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그가 참여한 녹음이 고작 24곡(겨우 CD 한 장 분량!)에 그친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 당시의 재즈는 트럼펫-트롬본-클라리넷이라는 일정한 편성을 요구했지만 베쉐이는 클라리넷을 대신해 색소폰으로 그 규칙을 깨려 했으며 특히 트럼펫 주도의 전통을 애써 거부하려 했던 것이다. 존 칠튼이 지난 87년에 쓴 시드니 베쉐이에 관한 권위 있는 전기 [The Wizard of Jazz]는 베쉐이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허구였음을 밝혀 냈지만 그의 성격이 자기 중심적이며 자아 도취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녹음과 공연은 늘 그를 배척했고, 그 결과로 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미국 밖에서 보내야만 했다.
이를 계기로 베쉐이는 41년까지 빅터 레코드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으며 그 작품들은 한결같은 걸작이었다. 하지만 뉴올리언즈 재즈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41년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자 음반업계는 위축되었으며 연주자들은 파업했고 음악은 재즈를 떠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戰後) 비밥이라는 또 다른 재즈가 등장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베쉐이는 49년 또 다시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그것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10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처럼 ‘행복한 망명’이었다. 그는 뉴올리언즈 재즈 복고운동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특히 전후 재즈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던 프랑스에서 재즈의 상징처럼 대우받으면서 인생 그 어느 때 보다도 음악에 집중하며 살 수 있었다.
그것은 49년 이후 프랑스 보그 레이블에서 녹음한 많은 음반들이 증언해 주고 있으며(여기에는 그가 작곡한 소프라노 색소폰과 관현악을 위한 발레음악과 광시곡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52년에 녹음된 ‘Petite Fleur'(작은 꽃)는 그의 또 다른 명곡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프랑스 대중 음악 속에서 그를 예찬한 여러 노래들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리비에라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재즈는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음악이라는 일부 프랑스인들의 극단적인 궤변도 그래서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재즈가 프랑스 문화권 속에 있던 뉴올리언즈라는 곳에서, 그것도 아프리카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베쉐이(Bechet)라는 프랑스 성을 가진 거장이 초기재즈 시대에 살았고 그가 파리에서 뼈를 묻었으니까 말이다. <황덕호 / 재즈칼럼니스트>
Sidney Bechet 의 한글 번역 이름은 비슷비슷하게 등장하지만 나는 위의 글쓴이처럼 시드니 베쉐이라고 표현한다. 암스트롱(1901-1971)과 동 시대에 활동했던 거장인데 우리에게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 뉴올리언즈의 초기 재즈 모습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프랑스의 혼혈인 크리올에게서 흔적이 찾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베쉐이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기의 재즈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비밥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는 시기... 회현역 지하상가 낡은 LP점에서 우연히 구한 베쉐이의 음반을 나는 낡은 커버를 바꾸지 않고 그 시절의 냄새처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가끔 그 음반을 CD로 불법 복각(?)하여 가끔 가까운 재즈 매니아들에게 주곤 했었다.
1년전 재즈소리사랑의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루이 암스트롱이나 BB King의 음반을 CD로 복각해서 회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었는데 이제는...저작권 법이니 뭐니해서 음원 추출하기도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그냥 요즘은 홀로 듣는다. 50년 전에 죽은 사람의 희귄 음반을 나 혼자 듣다니...음원 낭비라고 생각하건만...
그래도 이번 재즈소리사랑의 회원이 1,000 되는 날 카페지님께 오프라인 파티라도 하자고 할까 보다... 그 핑게로 베쉐이의 10년 음원을 우리 회원님들께 나누어 드릴까나...~변산바람꽃~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 Sidney Bechet
D-Jam Blues - Sidney Bec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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