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미의 문학서재 §/◎ 강미의 斷想

고독에 대하여 - 나에게로 이르는 통로

변산바람꽃 2014. 4. 7. 15:21







[다시 고독에 대하여 - 나에게 이르는 통로]



2014년 새해가 되면서 내가 만든 버킷리스트 첫번째는 가능한한 일주일에 두 세번 산책을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대로 지켜질 자신은 없었지만 자기와의 약속의 의미로 설정했었다. 늘 봄이면 유독 병원에의 입원이 잦을 만큼 환절기를 잘 넘기지 못하는 탓에 건강을 위하자는 이유였다. 아마도 내 생애에서 스스로 건강을 염려하여 무슨 계획을 세우긴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그 산책의 약속은 일 주일에 두 세번이 아니라 한 달에 한 두어번 밖에 아직은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정확하게 지켜지지는 않고 있지만 산책을 통해 나는 누군가와 만나지지 않는 공간으로의 어슬렁거림, 때론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서 온전히 혼자이지는 못했지만 나와의 내밀한 대화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치는 들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가능했다. 그렇다고 혼자만을 위한 산책에서 혼자인 적은 없었다. 


비가 내리는 평일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공원 귀퉁이를 향한 길로 잠시 산책을 나간다. 인적이 없는 공원 전체의 숨소리를 나혼자만 가득 느끼게 된다. 오로지 그 공원 안에서는 빗소리와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리는 휘파람소리, 자박자박 풀잎 위에 떨어지는 풀잎과 비가 조우하여 부딪치는 소리...그 소리들 속에 오롯이 홀로 선 나...아, 그 절대적 공간에 꽉 찬 나의 존재에 대한 뚜렷한 느낌...그 순간의 절대성이 주는 침묵이 좋다. 그 순간에는 나는 완전한 홀로로서 존재하지만 너무나 꽉 찬 나에 대한 인식으로 홀로이면서 외롭지 않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절대적으로 나에게서 고독한 순간 안에 그렇게 서있는 그 때가 나를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외롭지 않아서 자신에게 더 가까운 고독은 그래서 한 순간에서 끝나지 않는 자신에게 가는 길을 열어놓는 통로이기도 하다. 고독은 나에게로 이르는 통로이다. 


사실 남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순간들은 나누는 말로 인한 진정성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내 말이 오롯이 진정성 있게 전달되고 나누어지지 못할 때 느끼는 한기처럼 다가오는 공허함은 나를 외롭게 한다. 대중 속에서 관계로 인해 느끼게 되는 외로움은 내 존재감을 흩어놓을 뿐만 아니라 내 존재감과 타인의 존재감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서 결국은 외톨이가 되게 한다. 사람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고독이 아니다. 그건 섞이려고 하는 몸부림에서 오는 섞이지 못한 자의 외로움이다. 고독의 속살은 그런 무의미한 대화에서 벗어날 때 나타난다.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 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 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 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

루소는 "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 " 고 말했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있을 때 엄습한다.>

 -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의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중에서-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라는 마리엘라의 글처럼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혼자 있을 순간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럿의 관계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며, 티비나 인터넷 속에서 정보를 찾아가며 어우러지는 선택을 하고, 물질적으로 소유하는 삶을 통해 적당히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에서 행복의 동기를 찾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혼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다 가져도, 사랑한다고 하는 이가 곁에 있어서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어도, 일 속에서 바쁘게 성취감을 채우며 인정받고 사는 순간에도 그런 모든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없는지..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나'라는 존재를 멀건히 바라보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되지 않는지...하루종일 정말 열심히 살아온 나는 정말 '나'일까...


<내 그림자가 꼴보기 싫을 때가 있다.

산다는 것이 지긋지긋할 때가 있다.

....

나는 차분히 산책을 한다.

두 눈을 뜨고, 구두를 신고,

분노하며 망각을 벗삼아

걷는다.>

-네루다의 산책' 중에서-


관계 속의 나에게 지치는 순간, 내게 있어 삶은 무의미해진다...이때의 무의미는 절대적인 나의 자아와 멀리 있게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내가 나로부터 멀어진다고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는 나를 혼자있지 못하게 한다. 한 딸의 엄마로, 누군가의 선생님으로, 어딘가의 오너로, 그리고 또 누군가의 연인으로 또 어디의 책임자로 그렇게 변함없이 누군가, 어딘가의 관계 속에서의 나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관계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 그 어딘가에서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 모든 것과 같이 있는 순간에 반드시 내가 나로 있게 되는 아니다라는 일치하지 않는 괴리감으로 나는 홀로인 순간이 그립고 그리고 외롭다.  그 외로움은 홀로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고, 그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홀로 고독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세상과 내 사이의 틈이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승 시  '수선화에게' 중에서 -


내가 나에게로 진정으로 고독하다는 것은 오히려 내 삶의 피부를 서늘하도록 깨우는 신나는 순간이다. 왜냐면 관계 속에서의 고립과 슬픔과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독하다는 것은 내가 속한 관계,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 속으로 더 자유롭게 들어가기 위한 양분이기에 나는 고독하기 위해 산책을 하게 된다. 오히려 더 깊은 생각과 깊은 관계를 위해 내가 나에게로 걸어갔다 나오는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만의 생의 리듬이 있다는 믿음, 외톨이로서의 홀로가 아니라 내가 내 앞의 길을 어슬렁거리며 앞질러 가도록 나를 내 앞에 풀어놓는 자유로움으로서의 홀로인 순간에 대한 믿음, 그 어떤 폭풍우 같은 생의 변화가 닥치더라도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갈 수 있는 나에게 든든한 벗인 나를 조우하는 순간이 고독이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나에게로 가는 고독한 산책을 나선다. 아, 오늘 하늘빛은 비록 우울하지만 나를 만나러 나가려는 나여...너는 충분하게 고독하여라..


(강미/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