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레로의 처연함으로 노래하는 야상곡
1937년생으로 어느덧 육순의 나이를 훌쩍 넘긴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의 2001년 신작은 그의 음악적 한 축인 낭만과 서정, 관조와 향수라는 측면에서 기술된, 또 하나의 온건한 음악이다. 이 앨범에서는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의 비감 어린 댄스 음악 볼레로 (Bolero)를 유럽의 낭만적인 클래식 음악인 녹턴(Nocturne, 야상곡)의 정서를 융화,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라틴 볼레로는 1800년대 중반 쿠바에서 태어났는데, 아히티에서 이주해 온 아프리카인들에 의해 쿠바의 산티아고에 도입된 무용 음악 형식으로 유래되어 훗날 2/4 박자의 쿠바 볼레로, 보다 감성적인 푸에르토리코 볼레로, 열정적인 멕시코 볼레로로 분화되었다. .한편, 라틴어 '녹스'에서 파생되어 로마 시대에 '밤의 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녹턴'이라는 음악적 형식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곡가 존 필드에 시작되었다. 그는 녹턴의 기원과 명칭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밤의 기도(녹턴)'에서 찾아내며, '야상곡(夜想曲)'이라는 특별한 용도를 마련하였다.
찰리 헤이든의 의도는 라틴 볼레로의 고유한 음악적 내용과 형식을 녹턴과의 유사성을 추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바램은 찰리 헤이든이 데뷔 초기부터 후견인을 자청하며 발 굴했던 쿠바 출신의 걸출한 재즈 피아니스트 곤잘로 루발카바(Gonzalo Rubalcaba)로부터 구체화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연은 찰리 헤이든이 쿠바의 서방 세계와의 단절성으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던 (곤잘로 루발카바라는 보물을 찾아내었던)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찰리 헤이든은 곤잘로 루발카바의 앨범 [Discovery: Live At Montreux](1990), [The Blessing](1991), [Suite 4 Y 20](1992), [Imagine](1993-94)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1998년 몬트리얼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찰리 헤이든의 트리오 작업 일환에 곤잘로 루발카바가 우정어린 성원을 바치는 것으로 이어졌다([The Montreal Tapes](1998)).
라틴 볼레로의 출원지인 쿠바에서 태어난 곤잘로 루발카바이기에 그는 보다 분석적이고 용이하게 라틴 볼레로를 현대 재즈의 감각으로 이식시킬 수 있었다. 11개의 수록곡의 기본 골격은 곤잘로 루발카바(피아노)-찰리 헤이든(베이스)-이그나시오 베로아(드럼)의 피아노 트리오 형식위에 각 곡마다에 새로운 아티스트가 덧붙여지는 형식이다. .
'야상곡'이라는 주제가 부착된 앨범의 의도를 너무나 잘 설명하고 있는 시작곡 'En La Orilla Del Mundo'에는 트리오 형식에 테너 색소포니스트 조 로바노(Joe Lovano)와 바이올리니스트 페데리코 브리토스 루이즈가 가세하고, 이 다섯 명의 조합 뒤에는 곤잘로 루발카바가 직조해 놓은 현악 오케스트라의 선율미가 흐른다. 마치 꿈을 꾸는 듯이 흐르는 고결한 피아노 인트로에 비장함을 가득 안은 바이올린의 선율과 조 로바노의 격조 높은 비브라토에 의한 테너 색소폰이 어울리는 도입 부분에서 이미 앨범의 의도는 분명해 진다. 곤잘로 루발카바가 구사하는 피아노 프레이즈 양식은 분산화음(分散和音)의 반주를 타고 느린 속도로 꿈을 꾸는 듯한 오른손의 선율이 흐르는 녹턴의 피아노 스타일의 응용이다.
볼레로에 깃든 처연한 서정과 유장한 멜로디의 아름다움은 깊은 상념에 빠진 밤 하늘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이어지는 'Noche De Ronda'는 라틴 볼레로의 거장 어거스틴 라라의 작곡으로 냇 킹 콜(Nat King Cole), 티토 푸엔테의 연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쿠바 볼레로의 명곡. 여기에는 찰리 헤이든의 친우 팻 메스니(Pat Methney) 의 사색적이고 은은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 더해진다. 1973년 오넷 콜맨 밴드에서 처음 조우한 이래 팻 메스니의 리더작[80/81](1980), [Rejoicing](1983), [Song X](1985),[Secret Story](1992), 그리고 1997년 두 사람의 오랫 우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어우러졌던 듀오 앨범[Beyond The Missouri Sky]에 이르기까지 찰리 헤이든과 팻 메스니의 신의는 깊고 두텁다. 비록 이그나시오 베로아가 풀어내는 라틴 리듬의 정형 속에서도 팻 메스니의 고유한 이미지 새김과 찰리 헤이든의 한없이 너그러운 베이스의 만남은 를 재현하듯, 지난 날의 추억을 따스하게 회상하는 노스탤지어의 향기로 가득하다.
피아노 트리오로 연주된 볼레로와 녹턴의 유기적 결합 'Nocturnal'에 이어지는 찰리 헤이든 의 오리지널 'Moonlight'에는 다시 한번 조 로바노가 참가한다. 찰리 헤이든과는 1990년 리벌레이션 뮤직 오케스트라의 [Dream Keeper]에 참가했고, 곤잘로 루발카바와는 1997년 공동 리더작 [Flying Colors]를 통해 두터운 교류를 나누었던 조 로바노이기에 두 사람의 의중을 헤아리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를 연상케 하는 두터운 색소폰 톤과 레스터 영(Lester Young)의 부드러운 프레이즈를 흡수하고 있는 조 로바노의 육감적이지만, 결코 가볍게 부유하지 않는 무드 색소폰은 표제로 명시된 '달빛'의 아름다움과 서정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 조 로바노는 곤잘로 루발카바가 1992년 [Suite 4 Y 20 7]에서 발표한 바 있는 작곡 'Transparence'와 마지막 트랙 'Contigo En La Distancia/En Nosostros'에서 다시 한번 여유로운 발라드의 이완 속에서도 모던한 감각과 품위를 잃지 않는 테너 색소폰을 선사한다. 다섯 번째 'Yo Sin Ti'는 3/4 박자 볼레로의 비트감을 지속적으로 실어 나르는 드럼과 퍼커 션의 리듬 위로 페데리코 브리토스 루츠의 애처러운 바이올린의 선율과 곤잘로 루발카바의 맑은 피아노의 터치가 밀애를 나누는 듯한 정경이 묘사된다. 'No Te Empenes Mas'와 'Tres Palabras'에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데이빗 산체스가 참가한다. 그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가 라틴 볼레로의 명소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데이빗 산체스의 참가 또한 현명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그의 음악 스타일이 아프로쿠반 재즈 스타일에 비 밥을 접목시키는 것이기에, 데이빗 산체스는 마치 고향의 포크 송을 연주하듯 친숙한 환경에서 고즈넉하고 감미로운 향미료를 밤 하늘에 흩뿌려 놓는다.
곤잘로 루발카바의 섬세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몽환적인 조 로바노의 테너 색소폰과 섞여 고도의 응집된 우울함을 빚어내는 'Transparence'에 이어지는 8번째 트랙 'El Ciego'는 멕시코의 로맨틱한 작곡가 아르만도 만자네로의 볼레로 작품으로, 페데리코 브리토스 루이즈의 바이올린은 흡사 탱고와 집시 음악의 애절한 비장미를 옮겨 놓은 듯 하다. 밤 하늘에 쏟아지는 별빛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찰리 헤이든의 작곡 'Nightfall'은 피아노 트리오로 연주된다. 이 트랙에서도 강조되고, 앨범 전체에서도 한결같이 유지되는 베이스 플레이어 찰리 헤이든의 입장은 '중용과 절제'를 향하고 있다. 그는 결코 많은 음을 구사하지 않지만, 두텁고 풍부한 공간 음을 자아내는 베이스 피치카토로 전체 사운드를 훈훈하게 감싸고, 무게 중심을 잡아 준다. 이 곡에서 베이스 솔로에서 멜로디를 표현할 때에도 그는 손가락과 베이스 현이 미세하게 부딪히는 음과 지판이 닿는 소리가 더욱 극적인 음악적 요소로 표현될 수 있도록 크고 묵직한 베이스의 선을 지키고 있다.
바비 허처슨(Bobby Hutcherson), 칼 제이더, 조 헨더슨(Joe Henderson), 케니 버렐(Kenny Burrell), 추초 발데스(Chucho Valdes) 등 많은 재즈 아티스트들이 거쳐갔던 레로의 명곡 'Tres Palabras'에서는 이봉조를 연상케 하는 데이빗 산체스의 사색과 낭만적인 색소폰 톤이 우울하게 흐른다. 라틴 볼레로의 비감과 낭만을 밤의 적막함을 위무해 줄 수 있는 현대의 야상곡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앨범의 대미는 멕시코 볼레로의 명곡 'Contigo En La Distancia'와 'En Nosostros'의 접속곡으로 닫아진다. 절약된 한음 한음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말하는 능력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찰리 헤이든의 베이스 솔로, 곤잘로 루바라바의 상상력 가득한 프레이즈의 연결, 쉼 없는 생명력과 사운드의 입체감을 전해주는 이그노시아 베로아의 리듬, 그리고 이 한없이 여유로운 리듬 위에 자유롭게 활공하는 조 로바노의 색소폰의 조화를 듣고 있는 밤이라면,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앨범 전체는 시종일관 이완된 분위기로 이어지며, 감미로운 여성적인 악상과 과다한 낭만과 서정으로 자칫 졸립고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찰리 헤이든의 의도는 바로 그것이다. 찰리 헤이든이 이 앨범에서 뜻하는 것은 그렇게 아름답고, 나른하고 지루한 발라드 음악의 모음을 '밤'이라는 시제와 '사색'이라는 주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강인한 의식과 철학으로무장한 전사와 온화한 로맨티스트의 가슴으로 양립된 면을 하나의 음악으로 풀어가는 찰리헤이든이기에 그의 한없이 탐미적인 제언도 진실한 소리,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올 한 해. 이런 저런 생각에 잠 못 드는 밤에는 찰리 헤이든이 선물한 야상곡이 곁에 있을 것 같다.
글 / 하종욱 자료제공 / 유니버셜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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