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가을 ▒ 전화선을 타고 오는 당신의 목소리에 가을이 묻어왔습니다 봉숭아 꽃물 가득 들인 손톱처럼 내 가슴에 한아름 가을이 묻어왔습니다
당신의 낮은 음성 사이로 저 숲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 들리고 그 바람 소리따라 물이 드는 낙엽 하나 둘 가을을 색칠하고 있습니다
내 가슴도 절로 물이 들어서 바알갛게 채색되는 구월의 하루 당신의 기억 하나만으로 나의 가을은 온통 아름답습니다
▒ 가을 커피 ▒ 가을엔 커피 향 속에서 낙엽 냄새가 난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릴 적 친구처럼 하나 둘 그리움 쌓여 가을 냄새가 난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세월의 노래 낡은 풍금되어 젖은 가슴 울리며 보고싶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가을은 저 혼자서 추억을 부른다
가을엔 커피 향 속에서 단풍 냄새가 난다 지난 밤 꿈 속에서 입맞춤한 그대처럼 하나 둘 설레임 쌓여 가을 냄새가 난다
물드는 잎새만큼 깊어가는 사랑 온 몸 마디마디 핏줄처럼 휘돌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하지 않아도 가을은 저 혼자서 사랑을 익힌다
▒ 그리움도 가을만큼 깊어가고 ▒ 하늘이 푸른 만큼 깊어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넘실대는 그대의 강,
차마 건널 수 없는 이름 하나만 나룻배 가득 쌓아 놓고서 결국은 노 한 번 젖지도 못한 채 끝없이 깊어만 가는 내 마음의 강
이제 또 가을처럼 물들어 갔으면 좋겠다 그대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갔으면 좋겠다
언젠가 만나는 날 돌아오겠지 저 강을 건너는 날 찾아오겠지
그 날도 지금처럼 가을이면 좋겠다 그 날도 오늘처럼 파랬으면 좋겠다
▒가을에 쓰는 시▒ 코 끝에 스치는 바람만큼만 고독할래요
그 바람 따라 흩날려 우는 저기 저 잎새만큼만 서러웁고요
서러움에 지쳐 부대끼는 날 나도 그만 빨갛게 물이 들어서 떨어지는 낙엽만큼만 슬피 울래요
가을은 가을답게 외로워지는 것
가을은 가을답게 쓸쓸해지는 것
아무리 둘러봐도 혼자인걸요
아무리 찾아봐도 나 혼잔걸요
▒가을 엽서▒ 사랑한다고만 쓰자
목숨껏 그리웁다고만 쓰자
세상에 줄 것이 너무 많아
자꾸만 자꾸만 익어가는 가을,
이 가을엔 우리도
사랑한다는 넉넉한 말을 주자
그리웁다는 너무나 그리웁다는
꿀물처럼 달콤한 그 말을 주자
▒날마다 좋은 날▒ 그대가 바라보는 하늘이 오늘은 조금 더 파래지기를
그대가 바라보는 들녘이 오늘은 조금 더 맑아지기를
그리고 그대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오늘은 조금 더 아름답기를
작은 기도로 아침을 여는 날 그대의 마음에 햇살 깃들고 나의 마음에 웃음 머물고
아 이런 날은 날마다 좋은 날 아 이런 날은 날마다 고운 날
▒물 들이기▒
지난 여름, 풋사랑에 맘 아파 흔들리더니 다시 또 뜨락엔 황홀한 고백 온 몸으로 그 사랑 전하고 있다
그래 받아주기
뜨거운 네 심장에 아직도 차가운 내 가슴 부비기
사랑이란 이렇게 물들어가는 것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가장 진하게 물들어가는 것
그래 안아주기 그래 포옹하기
▒매미▒ 바람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사랑한 일로 한사람을 진정 사랑한 일로 속 울음까지 모두 비워내고 싶다 너를 만나기 위해 습하고 어둔 땅 속에서 지내던 세월, 다만, 너를 만나기 위하여 너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다시 가벼워지고 싶다 너를 사랑한 몇 날 너를 위해 살 수 있던 몇 날 부끄럼 하나 없이 모두 다 주었기에 온 마음 다 바쳐 너를 위해 살았기에 나는 다시 가벼워지고 싶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 
▒ 바닷 속 작은 돌 ▒ 나는 당신의 가슴 어느 한구석 제멋대로 쑤셔박힌 그리움이에요
당신이 눈길 한 번 건네지 않고 당신이 손길 한 번 보내지 않는 그러나 당신의 어느 빈 자리 구석진 응달에 쭈그려있는,
나는 단지 하나의 눈물이에요 너무나 무거워 꺼낼 수 없는 당신의 가슴에만 살아있는 이야기 당신의 마음 속 깊이에 던져져 평생토록 꺼낼 수 없는 서글픔이에요
당신의 보고픔, 닳고 닳아 모나고 각진 곳 하나도 없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몸,
나는 다만 하나의 그리움이에요 당신밖에 모르는 화석이 된 그리움이에요
▒ 편지 ▒ 오래 전 아주 오래 전에 고백했던 말
사랑합니다
지금도 다시 써 보는 말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칠 곳 아무데도 없는 그 말,
받는 이도 없이 오늘 밤 또, 나는 그 말을 씁니다
삭막한 세상 위로 종일토록 비가 흘러 내린다
다시 또 새 꽃잎 피우기 위해 꽃밭마다 한가득 비가 내린다 ▒ 그리운, 언제나 그리운 ▒ 사랑하는 당신, 이렇게 쓰고 보니 울컥, 그리움이 몰려옵니다
그치지 않고 흐르는 빗소리처럼 나의 그리움 끝없이 흐르다
당신 이름 앞에 멈춰섰습니다 강물처럼 흙탕물 고이지 않고 바다처럼 소금물 배이지 않은 연꽃보다 맑고 아름다운 물결, 끝없이 살랑이는 당신이라는 연못에 나의 그리움이 멈춰섰습니다
더는 흘러갈 곳 아무데도 없어 그리운, 언제나 그리운 당신의 품 안, 연잎처럼 넓고 부드러운 가슴에 나의 사랑, 마지막 닻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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