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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변산바람꽃 2011. 3. 29. 14:43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 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다
가끔은 슬픔없이 15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은 대면서
길들이 사방으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라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그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리 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이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나갔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 사라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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