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미의 문학서재 §/◎ 강미의 斷想

=나는 여전히 내 살아감의 모든 가치의 출발을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찾는다.=

변산바람꽃 2011. 5. 18. 20:16

 

 

 

=나는 여전히 내 살아감의 모든 가치의 출발을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찾는다.=

 

 

오늘 새벽에 다시 열이 오른 딸내미를 응급실로 데려갔다가 오전 10시쯤 집으로 와서는 둘이서 한 나절이 되도록 잠을 자고 일어났다. 세상은 누가 간밤에 죽었다 해도 여전히 같은 흐름으로 나름 잘 흘러간다.

 

그렇게 모녀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같은 질병을 목숨으로 앓아 내고 한 소큼의 잠도 한 목숨처럼 함께 자고 깨어난다.

 

그래서 일까...딸에게 같은 체질에 의한 오래 앓아야 할 병을 물려준 에미는 미안함과 안쓰러움과 때때로 겪는 이 딸을 지켜야한다는 강박감으로 인한 지나친 간섭으로 충돌하면서 이젠 애증의 관계가 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런 딸이 아침을 응급실 침대에서 맞으면서 눈을 뜨자마자 옆에 앉아 있는 에미에게 이 말부터 한다.

 

‘엄마. 광주 못가서 어떡해?’ 딸은 해마다 엄마가 광주에 가는 날임을 안다. 같이 갔으니까..

그래서 그랬다.

‘네가 엄마에게는 광주란다.’

딸이 그런다. ‘광주는 도시고 나는 딸이잖아...내가 왜 광주야?’

그래서 그랬다.

‘엄마가 살아온 날의 방황의 시작이 광주였고 살아가는 동안 저질러진 온갖 어리석음의 반성의 근거가 광주였고, 지금 살아가면서 더 잃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광주가 아직 있기 때문이란다. 또 너를 만나게 된 이유인 네 아빠와의 만남도 광주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만난 것이니까 너는 엄마에게 광주란다.’

딸이 그런다.

‘그래서 해마다 나를 데리고 광주 망월동 삼촌들 묘소랑 엄마 친구 묘소에 갔구나...’

그래서 그랬다.

이 말을 할 때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울음이 가슴으로 치어 오르더니 대답 보다 목으로 먼저 넘어 온다.

‘망월동 안에도 엄마가 해마다 내려가는 이유가 있고 망월동 밖에도 엄마가 내려가는 이유가 있단다. 광주 전체가 해마다 엄마를 가슴앓이 시키면서 자꾸 엄마에게 뒤를 돌아보고 가라 한단다. 너무 앞만 보지 말고...가끔은 뒤에 엄마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돌아보라 한단다. 그래서 무섭단다. 엄마는 때때로 광주가 무섭다. 가끔 엄마가 잊고 살 것 같으니까 엄마 등을 아프게 정말 아프게 가끔씩 때린단다. 그런데도 엄마는 도망갈 수가 없구나...도망가는 것은 더 무서워서 그래서 해마다 매일 매 순간 가슴 저 밑바닥에 광주를 담가 놓고 산단다. 도망가는 것 보다는 그것이 견딜만하니까...’

 

모녀는 오늘 아침맞이를 응급실에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 다시 온 5월 18일을 맞았다.

딸내미와 훨씬 가까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죽은 듯이 둘이 그렇게 자고 일어난 후에 인터넷을 통해 오늘 광주에서 혹은 서울에서 혹은 이 안양에서 있었던 5. 18 기념회 소식을 뒤져 읽어 보았다.

 

올해도 그리고 해가 갈수록 너무나 당연한 듯이 5. 18 기념회는 그렇게 온갖 정치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채 정작 그 날 그 광주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이들의 가족들과 광주는 뒷줄에서 무심한 하늘빛에 가슴 먹먹해 하는데도 그렇게 연례행사로 치루어졌나 보다.

 

뉴스의 한 쪽에서는 관변단체가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를 찾아 5·18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단다. 이들 단체는 "광주시민 학살은 북한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광주 5·18사건 유네스코 등재 반대 청원서'를 한글과 영문으로 각각 작성해서 제출했다는 소식을 본다. 하아...사람의 생각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인정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누가 그들을 뭐라 할 것인가...이제 더 이상 낙담이나 실망과 좌절감은 들지도 않았다.

 

요즘의 대학생들이 광주 민주화 항쟁을 이해하겠는가? 각 문화 예술 단체들이나 노동단체 온갖 단체들에서 해마다 오월만 되면 모두 애국지사가 된듯이 광주를 노래하는데 그들에게 5. 18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노래하는가 라고 물을 것인가?

 

모두 그렇게 오월 영령들의 뜻을 안다 한다. 모두 오월을 그리고 그 오월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야 지식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월을 부른다.

 

해마다 그렇게 오월은 광주와 무관하게 광주의 그 아픔들과 그 죽음들과 무관하게 다시 불려지고 이용된다. 심지어는 오늘 그 관변단체에 의한 것처럼 북한 소행으로 스스로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한다.

 

역사의 한 켠은 항시 당시대의 우리의 무관심과 우리의 무지를 대신해 줄 무언가를 희생양처럼 찾아오며 그렇게 지금의 21세기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 세대에게는 광주를 겪었던 겪지 않았던 광주가 면죄부이고 광주가 희생양이다.

 

여전히...광주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서 오늘 또 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또 다른 면죄부를 이 땅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오월 광주의 그 해 그 날은 아직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 할 것인가?

 

내 살아옴의 세월들은 비교적 원하는 삶의 형태를 외형적으로는 이루어 왔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좌절과 실패 그리고 그 속에서 버리지 못한 희망 한 조각 같이 해 온 삶이었을 것이다.

 

안양에서의 9년...공인으로서 때론 개인으로서 어찌 잘 살아오기만 했겠는가...

 

운영하는 학원의 위기로 빚더미에도 올라보았고, 명예가 땅바닥에 처참하게 버려지는 순간도 경험했고, 평생 지고 살아가야 할 질병으로 죽기 직전의 육신이 앓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지난한 시간 속에서 잃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학생들에게 내 실패의 몫에서 건진 다시 살아냄의 진정성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강의했으며, 미래의 희망을 일구는 노력은 현재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비전도 강의로 전할 수 있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잘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 싶다.

 

내 실패와 내 희망의 모든 시작이 광주에 있기에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이고 내가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이고 내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이유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내 어린 딸과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내 살아감의 모든 가치의 출발을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찾는다.

 

내게 광주는 명예도 핑계도 내 살아감의 실패에 대한 면죄부도 아닌... 광주에는 그 안에 담아온 역사로서 수 많은 죽음을 넘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의 그 날...5. 18일에 내 형제가 죽음으로 돌아와서도 아니다. 내 고향 어린 친구가 넋으로 헤매고 있어서도 아니다. 그날 나는 신촌 한 복판 대학에서 상아탑을 노래하고 있었다는 죄책감에서도 아니다.

 

광주 그 자체가 이 모두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홀로 가슴 앓아한다. 홀로 그리워 한다. 홀로 가슴에 희망을 울음으로 담아내고 있다.

 

(강미/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