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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강의 24.] 평범 속에서 걸어나온 악의 꽃

변산바람꽃 2011. 8. 12. 16:27

 

 

 

[논술강의 24.] 평범 속에서 걸어나온 악의 꽃


-43년전 유태인 말살정책 입안자 아이히만에 내린 사형선고-


범속하다’(Banal)하다는 사실, 즉 ‘아주 일상적이라 별다른 관심을 끌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편한 일이다. 적당히 고개를 돌리면 내 인생에 득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될 것도 없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정의관’(正義館)이라는 뜻의 ‘베트 하미쉬파트’라는 건물에서 개정되어 지금으로부터 꼭 43년전인 1961년 12월15일 사형선고로 결말이 난 예루살렘 지방법원 합의심에서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피고석에 앉은 사람은 바로 이런 범속한 인간 중의 한명,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20세기초를 풍미한 대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에게서 동시에 애제자로 인정받은 여류철학자로서 그녀 자신 유태인인이기도 했던 한나 아렌트(1906~75)는 직접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이 ‘아이히만 재판’을 방청하며 아주 정교하게 재판의 전말과 피고의 인생을 추적한다. 1963년 아이히만이 처형된 직후 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치밀한 철학적 훈련과 고도의 감수성으로 포착한 문제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재판이란 통상 법적 기준에 비추어 ‘비상한 악행’을 저지른 ‘인간’을 상대로 벌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고석에 앉은 고발된 인간은 ‘혐의를 받은 악행, 즉 죄지은 만큼 악한’ 인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260쪽에 달하는 이 재판방청기의 첫 두장은 양질의 칼제품 생산지로 유명한 졸링겐에서 출생한 이 평범한 독일 시민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극악한 인간으로서 국제적 관심을 모으는 재판의 피고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범속한’ 인생기를 묘사한다.

그야말로 평범한 가정의 4남1녀 가운데 장남, 학교 성적이 형편없어 일찌감치 세일즈맨을 키워내는 실업학교로 보내진 열등생, 따라서 일생 동안 상관의 지시에 따라 물건을 팔거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이외에 전혀 특출난 재능이 없던 소시민. 일하던 석유회사가 문을 닫은 뒤 독일국적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살던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던 실업자.

독일 국경 파사우에서 발이 묶였을 당시 군입대 제안에 “좋아, 군인이라면 어때”라는 심정으로 엉결겁에 입대해 1933년 8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지겨운 훈련을 받고 상등병으로 진급한 평범한 독일 병사. 그러나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병영생활을 못견뎌” 나치 보안대에 자리가 나자 계모쪽에 유태계 인척이 있음에도 바로 그 때문에 유태인 전문가로 발탁된 행정가. 그러면서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전혀 읽지 않은 나치 고위공무원.

한나 아렌트는 자문한다. 죄책감은 전혀 없이 충실히 공무를 수행하고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신의 딸을 끔찍히 아낀 이 범속한 인간이 어떻게 ‘유태인 말살정책의 기안자 및 실무책임자’로서 600만명의 유럽거주 유태인들을 한줌의 재로 만든 악마가 될 수 있었는가. 1945년 5월8일 독일이 패전하던 날 그가 받은 충격 역시 패전국 고위관리로서 비장하기는커녕 평범하기 짝이 없다. “이제 다시는 내게 지시하거나 명령할 상관도 없이 그저 개인으로서 어렵게 살아가야 하다니…”

1960년 5월1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원에 납치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선 이 범속한 인간에게 ‘유태 인민에 대한 범죄’ ‘인간성에 대한 범죄’ ‘2차대전 중에 저지른 전쟁범죄’ 등과 같은 거창한 죄목을 걸 근거나 권리는 어디에 있는가.

아이히만은 항변한다. “그런 죄목이라면 나는 무죄다” 그 이유는? “나는 내 손으로 유태인 아닌 그 어떤 인간도 직접 죽인 적이 없으며 죽일 의도도 없었다. 그리고 행정집행자로서 유태인 아닌 그 어떤 인간도 죽이라고 지목하거나 지목할 의도가 없었다” 이스라엘 검찰이 선임한 그의 변호사는 정교한 법률 이론으로 방어한다.

“살인죄라면 피고가 구체적으로 죽인 개인이 있어야 하고, 살인교사죄라면 구체적으로 죽일 개인이 지명되거나 그럴 의도가 입증돼야 한다. 단지 포괄적인 정책을 입안했다고 해서 그 기안자가 죽일 의도를 가졌다고 입증될 구체적인 개인이 없는데도 그에게 범죄 혐의를 둘 수 있는가?”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 검찰은 아이히만이 루마니아에서 직접 총격을 가해 소년 한명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인을 간신히 찾아냈다. 그러나 이 증인의 기억은 너무나 희미해 증거력을 갖기 어려웠다. ‘개인’을 법주체로 명시한 계몽주의 이래의 근대법 원칙이 일순간에 흔들린다. 아이히만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나치 비밀경찰이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집결시키고 처형한 것이 분명한데도.

아이히만은 말한다. “내가 살인행위를 방조한 것은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신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를 지은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직책에 있었다고 해도 유태인들의 운명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지 않은가”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다. 나를 재판하자고 하는 너희 유태교도 재판관들은 신인가? 그리고 내가 직접 하지도 않은 살인에 대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할 것인가?

법정은 고심 끝에 이 죄책감 없는 인간에 대한 대항논리를 발견했다. 범죄에 대한 처벌에서 본질적인 것은 범행의 사실성이 아니라 그 범행에 대한 ‘책임성’이라는 것. 따라서 “책임성의 정도는 자신의 손으로 치명적인 도구를 사용한 이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질수록 증가한다”

아이히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유태인에게 더 나은 운명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변에 대해서도 대답은 단호했다. “아이히만이 직접 기안한 유태인 말살정책(홀로코스트)보다 더 극악한 발상은 있을 수 없다” 더 이상의 항변력을 잃은 아이히만에게 1961년 12월15일 사형이 언도됐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범속한 인간이 악인으로 변모한 것일까. 그의 취조기록을 면밀히 검토하던 아렌트에게 섬광같은 깨달음이 왔다. 아이히만이 쓰던 말들은 자신의 깊은 심경 토로까지를 포함해 하나같이 독일 관청의 언어들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던 이 언어에서 벗어난 어휘로 자신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현대인이 극도의 사회적 분화 속에서 어떤 한 영역에 갇혀 있을 때 빠지기 쉬운 운명적인 상황을 읽어냈다. “말함에서 드러난 아이히만의 무능력은 생각함의 무능력,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사고의 무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와는 어떤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그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단어들과 타인의 존재로부터 철저하게 방호벽을 친 신뢰의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현실 그 자체로부터 완전히 차단당한 상태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 따라서 범속하다는 것 그 자체가 악에 대한 감각을 전적으로 말살시켰다. 악행은 사악한 악의뿐 아니라 현대인의 삶의 양식 그 자체를 구조적인 원천으로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 한수산씨는 ‘여성동아’ 98년 12월호에서 그런 악의 범속성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겪은 고문과정에서 발견했다. “취조실이 여러 개 있는데 서로 왔다갔다 하면서 때려요… 한참 때리다가 ‘야, 나 오늘 결혼식장에 가야 하는데 요새 부주는 얼마나 해야 되냐’하며 결혼식장에 갔다와요”

광주에서는, 날아간 총알은 있는데 총을 쏘거나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민주화됐다던 문민정부에서도, 국민은 IMF사태로 길거리에 나자빠지는데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산다고 한다. 외면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다는데도, 괜찮다는데도, 왜 우리에게 불편함이나 불쾌함은 커져만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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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

금속테 안경을 쓰고 숱이 적은 친위대의 한 중령이었던 그는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 나치 간부들로부터 유태인의 최종 처리-요컨데 대량 학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그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단기간에 얼마나 적은 비용을 들여서 유태인을 처리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유럽지역에서 처리해야 할 유태인의 수는 전부 천백만이었다.

차량 몇 칸을 연결한 화차를 마련해서 한 화차에 몇 명의 유태인을 몰아넣으면 되는가, 그 가운데 몇 퍼센트가 수송중에 자연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인원으로 그 작업을 처리할 수 있을까, 시체는 어떻게 하면 가장 비용을 덜 들이고 처리할 수 있을까, 불에 태울 것인가, 땅에 묻을 것인가, 녹여 없앨 것인가, 그는 이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서 부지런히 계산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략 6백만 명(목표의 절반을 넘는 수준)의 유태인이 그가 계획한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죄악감을 느끼지 않는다. 텔아비브의 법정에서 방탄유리가 둘러쳐진 피고석에 앉아, 자기가 어째서 이런 거창한 재판에 회부되어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아이히만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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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이 저렇게 평범하다니….”

아돌프 아이히만을 처음 본 한나 아렌트는 신음했다. 방탄유리에 둘러싸인 채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 그는 국제적 관심을 모은 전범재판의 피고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범속한 삶을 살아왔다.

학교 성적이 나빠 일찌감치 실업학교로 보내진 열등생. 실업자를 전전하다 엉겁결에 군에 입대했던 사회의 낙제생. 그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으나 히틀러의 ‘나의 투쟁’조차 읽지 않았다.

법정에 증인으로 나선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예이엘 디무르는 그를 보고 혼절하고 말았다. 재판관이 물었다. “과거의 지옥 같은 악몽이 되살아났습니까.” 디무르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니. 저토록 평범한 인물이 그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몰아넣었다니….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애제자이자 저명한 정치학자였던 아렌트. 미국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을 자원해 재판을 추적했던 그녀는 자문한다. 티끌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충실히 공무를 수행하고 아내를 사랑했으며 자식을 끔찍이 아꼈던 이 범속한 인간이 어떻게 ‘유대인 말살정책’을 기안하고 집행했는가.

그녀는 재판이 끝난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표해 지성계의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악이 우리의 일상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실제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의 전 생애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며 자신의 행위는 칸트의 인식, 즉 ‘범주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재판은 1년반을 끌었고 1961년 12월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 레드와인을 부탁해 반을 마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이히만은 끝내 자신의 죄(罪)를 알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