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미의 문학서재 §/◎ 에세이 서재

(안양신문 4월 1주 만필) 산을 내려오며.../ 강미

변산바람꽃 2009. 4. 10. 23:39

 

 

산을 내려오며...

                                                    

   강 미



  산이 하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산이 하나 있으면 많은 게 달라지는 법이다. 산이 있으면 나무가 있다. 소나무, 능금나무, 오리나무, 그리고 도토리나무……. 나무에는 열매가 열리고 새가 깃든다.  낮에는 동박새, 뻐꾸기 그리고 밤으로는 소쩍새의 그럴싸한 청승스러움도 있다.  산이 있으면 당연히 계곡도 있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에는 송사리가 헤엄친다. 가을이면 파란 하늘이 물에 담겨 흘러가고 빨간 단풍도 흘러간다. 산언저리에 둘러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복 받은 이들이다. 창을 열면 산이 성큼 눈앞에  다가선다. 그리고 산의 거친 호흡이 얼굴에 끼쳐진다. 산의 맑은 공기가 가슴 속 가득 들어찬다.


  주말이면 가벼운 차림으로 등산을 한다. 등산용 조끼를 걸치고 등산화 끈을 조이면서 산과의 만남에 약간은 설레기도 한다. 산자락에 다다르면 크게 숨을 들이 쉬며 산과 호흡을 맞춘다. 산의 호흡과  내 호흡이 일치해야 산을 오를 때 힘이 들지 않다. 그러고 난 후 다리에 힘을 실어가며 한 발 한 발 오른다. 숨이 찰 듯 하면 잠시 멈춰 서서 경치를 감상한다. 하늘을 배경으로 산과 계곡의 선이 빚어내는 그림은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다. 다시 한 발 한 발 씩 힘들여 산마루에 오르면 이마를 스치는 바람과 탁 트인 시야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산마루에서 사람 사는 곳을 내려다보면 마음자락이 한결 넓고 높아지는 듯하다. 이쯤 넓혀 놓으면 한 일주일 쯤 저자거리에서 부대끼며 좁아지고 천해지더라도 끄덕 없을만하다 싶을 때 산을 내려간다. 올라갈 때보다 오히려 더 신경을 쓰며 내려가야 하는 법이지만 그래도 하산 길은 등산 때보다 빠르다.


  이제 좀 넉넉해진 눈으로 거리를 걷다보면 정다운 풍경도 곧잘 눈에 띈다. 노점에 수복이 쌓인 귤이나 사과의 빛깔도 예사롭지 않다. 허름한 골목 대폿집에 김이 뽀얀 순대도 유난히 먹음직스럽다. 빛깔 고운 막걸리 한 잔 들이켜고 고기 한 점 집어 소금이나 새우젓에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하산주(下山酒)로는 더할 나위 없다. 뱃속을 싸아 하고 흘러내리는 술기운을 즐기며 허리를 곧게 펴면 다리에 조금 묻어 있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혹시 그 대폿집에서 산이 바라다 보인다면 산에게도 한 잔 권할 일이다. 


요즘처럼 길섶엔 봄이 무르익었음을 예고하듯 개나리가 농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벚꽃이 일제히 꽃망울을 피워 그 모습이 마치 삼월 춘풍에 눈이 날리는 듯 한 청계산에 가보시라...오르는 길이나 하산하는 길이나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산을 내려오며 인간이 토해내는 시끌벅적한 소음에 봄이 달아날까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 크게 하게 된다. 그래서 산언저리에 사는 이들은 정말 복 받은 이들이다. 하루의 잡답(雜沓)과 소요가 잦아들고 다들 잠이 든 후에도 산은 홀로 깨어 밤을 지켜주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