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의 예의
- 강 미 - (안양신문 만평 07년 7월기고문)
또 비가 내린다. 후두둑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스러워지면서 빗줄기가 더욱 굵어진다.
백 미리가 넘게 폭우가 쏟아진 곳도 있다는데 물난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서울의 문우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가움에 웬일이냐는 나의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얘. 오늘 한 잔 하지 않을래? 속이 울렁거리거든...”부터 말하는 것이다.
간혹 친구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을 때면 내 마음은 벌써 즐거움으로 술렁인다.
그런 좌석의 허심 없는 분위기 때문이다. 서로의 관계가 서먹할지라도 금방 친해질 수 있고 가까운
사람이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것도 큰 흉이 되지 않는 요즈음. 또 하나의 행복을 덤으로
받은 나는 분명 술꾼이라 하겠다. 얼큰한 찌개라도 끓이는 날이면 술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술을 즐기는 것은 친정아버지의 적잖은 영향을 받은 탓이지 싶다. 어머니께서는 술을
한 모금도 못하시는 분이셨기에 언제나 술심부름은 나를 시키셨고, 나 역시 그런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들려 준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 오면서 홀짝거리는 횟수가 늘어 가고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는 흥을 돋우기에 충분했으니 일찍이 술맛에는 조숙했었나 보다.
남자 동기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퇴근길에 한 잔씩 하고 집엘 가는데 갑자기 길바닥이 벌떡 일어나
자기 면상을 치더란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는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한 두 번의 실수를 하지
않는 이 있을까마는 설령 실수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자랑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도 술꾼다운 경험이 있었으니 30여년도 넘은 초등학교 때 이야기이다.
달도 별도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별들이 쏟아질 듯 위태롭던 초여름 밤. 초등학교 모교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막걸리를 마셔 보던 날이다. 아버지의 심부름이었는데 무슨 맛인가 입에 넣어 보고 싶어서
집에 오는 길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주전자채 홀짝이며 막걸리를 마신 것이다.
쓴 맛만도 아니고 약간은 시큼하고 달착지근한 아무튼 여러 가지를 섞어놓은 것 같은 먹기 힘든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달착지근해지면서 주변의 풍경들이 왔다갔다 해보였다.
운동장에 있는 놀이 기구들이 친구들처럼 보일 때 왜 갑자기 집에 올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발끝의 높낮이에 이상한 굴곡과 몽롱해지는 정신이 겁이 났던 모양이다.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혼자 집에 오기 위해 교문을 향해 걷는데 걸음이 자꾸 옆으로만
걸어지던 미묘한 현상에 왈칵 두려웠던 생각이 난다.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이 나는데 어떻게 집엘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고 운동장에서 나와 상여집을 지나면서 옆으로만 걷던 일이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처럼 어른거렸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은 멀기도 했지만 그 길 으슥한 곳에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취한 상태에서도 그 곳은 무서웠었나 보다. 그날의 사건에서 기억나는 것은 오직 상여집 앞을 빨리 지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만 기억이 나니까...
결국 그 날 아버지께 갖다드린 막걸리 주전자는 텅비게 되었고 나는 그날 아버지의 어이없어 하시는 너털웃음을 따라 히죽히죽 웃었던 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물론 어머니께 오지게 혼난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사가 생긴 것이다. 지금도 다음날 연신 웃으시면서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켜서 국물을 먹으라고 하셨던 아버지와의 막걸리에 얽힌 교감이 그립게 추억된다.
지금은 상여집도 없어지고 오래된 추억으로 그때를 떠올리면 얼큰한 짬뽕국물이 생각나는데 다음날 아침 어찌나 속앓이를 했던지….중국집 간판을 볼 때마다 지금도 숨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아버지와 짬뽕...그리고 막걸리...대학때 부터 술 자리가 있으면 그 이후 얼마전까지 나는 막걸리만 마셔왔다.소주도 맥주도 아닌 오로지 막걸리만 성인이 되어서 줄곧 마셔왔던 것은 막걸리가 내 혈액 속에 친숙한 또 다른 원인물질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까...이제는 몸도 마음도 세월을 비껴가지 못해서 막걸리도 혹은 또 다른 술도 예전처런 말술로는 마시지 못하지만 중년의 사추기를 겪고 있는 아직까지 단주를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이 또한 술꾼의 예의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