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전설, 거부할 수 없는 진실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전설이 존재한다. 스포츠, 음악, 미술, 영화, 정치... 모든 전설들 속에는 신화가 된 인물이 있고, 사람들은 쉽게 그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찰리 파커는 재즈의 전설이다. 루이 암스트롱이나 마일스 데이비스 보다 더 흥미롭게 우리를 자극하는 그의 관한 수 많은 야사들은 재즈로의 여행으로 손짓하는 강력한 유혹이 되어주었다. 여기에 더해진 가설과 폐설까지 합쳐지면 찰리 파커의 이름은 어느새 재즈의 이미지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재즈란 과연 그런 것인가?
'자유'라는 언어의 유희로 타락한 천재를 감싸 안는 것이 재즈라는 음악의 진실은 물론 아닐 것이다. 재즈광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제작한 [버드]라는 영화는 바로 이 찰리 파커의 전설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찰리 파커는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한 흑인 음악가의 고뇌일 뿐, 신화로까지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재즈역사의 위대한 혁명 '비밥'의 탄생을 주도하면서, 따지고 보면 모두가 전설이었을 최고의 뮤지션들이 운집했던 1940년대 전체를 지배했던 그 카리스마야말로 영원히 살아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앨토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Charlie Parker 1920-1955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비운의 인물이었지만 그 가 재즈계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아직까지도 많은 재즈 팬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지만 파커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렸던 어머니의 노력에 힘입어 음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32년 링컨 하이 스쿨(Lincoln High School)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게 된 찰리 파커는 밴드부에 가입하여 나름대로 활동을 해보지만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사준 초라한 알토 색소폰 하나는 파커에게 새로운 인생의 활로를 제공해 주었다. 미친 듯이 색소폰 연습에 몰두하여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개발하고자 노력했던 그는 가끔씩 몰래 클럽에 숨어들어가 평소 동경하던 레스터 영(Lester Young)의 연주를 보며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커다란 포부를 다져갔다. 결혼했던 찰리 파커는 그해 여름 교통사고로 지급받은 보험금으로 새 색소폰을 구입하는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소양을 쌓았던 찰리 파커는 제이 맥샨(Jay Mcshann)의 밴드에 가담하여 한동안 활약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길을 모색해 보지만 또 다시 술과 마약을 탐닉하며 삶의 위기를 맞이하고 만다.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했던 인물은 어느날 우연하게 만난 클라리넷 주자 버스터 스미스(Buster Smith)였다. 찰리 파커는 그를 평생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으며 언제나 그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얻곤 했다. 한 단계 발전한 실력을 선보이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재즈팬들은 환호했고 찰리 파커의 독특한 연주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는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밴드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트럼펫터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깊이 있는 음악적 교류는 물론 두터운 우정을 쌓게 되었다. 두 아티스트는 그 후에도 많은 공연을 펼치며 재즈계의 주요 인물로 자리 잡았다. [Hot House]를 레코딩하여 좋은 평가를 얻었으며 52번가에서의 지속적인 라이브 공연으로 여러 팬을 확보하게 된다. 공연에는 어린 나이의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가 함께 했으며 평론가들은 바로 이시기의 음악을 진정한 비 밥(Bebop)의 완성체로 평가했다.
남기며 재즈계의 주요인물로 떠오른 찰리 파커는 46년부터 노먼 그랜츠(Norman Granz)와 손잡고 버브(Verve)를 통하여 앨범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레스터 영(Lester Young),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버디 리치(Buddy Rich)등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함께 한 라이브 실황 앨범으로서 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와 함께 큰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그는 이후 평소 동경해오던 테너맨 레스터 영(Lester Young)과 [Bird & Pres]를 발표하는 영광을 안으며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했던 찰리 파커는 이후 에롤 가너(Erroll Garner), 바니 커셀(Barney Kessel)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재기하게 된다. 맥스 로치(Max Roach) 등과 퀸텟을 결성하여 활동을 펼쳤던 찰리 파커는 같은 해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밀트 잭슨(Milt Jackson) 등과 함께 카네기 홀(Carnegie Hall)에서 호연을 펼침으로서 팬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마일스와 맥스 로치와의 공연은 언제나 클럽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이 시기 발표한 [Bird at the Roost:The Savoy Years]는 평론가들로부터 극찬과 함께 잡지 ‘Metronome'에서 뽑은 최고의 알토 색소폰주자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룬다.
행크 존스(Hank Jones), 레스터 영(Lester Young)등과 함께 한 [Jazz at the Philharmonic, 1949]를 발표하여 호평 받았으며 이어서 오케스트라 악단과 함께 한 [Charlie Parker With Strings], 버드 파웰(Bud Powell), 리 코니츠(Lee Konitz), 소니 스팃(Sonny Stitt)등과 함께 한 [Charlie Parker & Stars of Modern Jazz at Carnegie Hall(Christmas 1949)] 앨범도 팬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마약과 술에 중독된 방탕한 나날을 보내던 중 챈 리차드슨(Chan Richardson)을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하며 후일 두 아이를 낳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찰리 파커는 다시 노먼 그랜츠와 손을 잡고 몇 장의 앨범을 발표한다.
두 거장의 진가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명반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여러 거장들과 명연주를 펼치며 재즈 팬들을 열광케 했다. , 버드 파웰(Bud Powell), 맥스 로치(Max Roach)와 함께 메세이 홀(Massey Hall)에서 역사적인 명연주를 펼쳐 크게 주목 받는다. 그러나 54년 캘리포니아에서 투어를 단행하던 중 딸 프라이스(Price)의 사망 소식을 접한 찰리 파커는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고 더욱 심하게 약물에 손을 대며 방황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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