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주제강의 2.] 아버지의 이름으로
여러분 혹 이런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내 인생 내 몸으로 내가 사는 건데, 왜 내 맘대로 못하는 거야?’라고....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박목월의 <가정(家庭)>이란 시의 마지막 연이 랍니다.
아버지는 오늘도 어둠이 지상을 덮을 즈음,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추운 길을 걸어 집에 돌아옵니다. 현관에 놓인 아홉 켤레의 신발은 아버지가 굴욕을 참고 굶주림을 견디는 이유이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설프기만 합니다. 아버지가 신어야할 신발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십구문반(약468㎜). 하지만 아버지는 그 신발을 벗어 던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과 얼음의 길을 걷기에는 아버지의 신이 너무 큰데, 당신의 얼굴에는 미소가 흐릅니다. 무엇이 아버지로 하여금 그 큰 신발을 신고 이 추운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걸까요?
아마 두번쯤 보았을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인데...반항적이고 철없는 아들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서도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감옥에서 죽은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비록 가난하고 힘없는 병자이지만, 굳건한 의지를 가진 시대의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박목월의 시 <가정>에서도 아버지는 십구문반짜리 버거운 신발을 신고서도 얼음과 눈으로 짜 올린 추운 길을 미소 지으며 걸어가는 우리들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더욱 더 발달하고 우리나라는 더 많은 돈이 넘치는 부자나라가 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들의 아버지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중략)…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희덕, <못 위의 잠>부분
좁은 골목길, 쭈빗거리며 꾸부정히 뒤따라오는 한 사내의 모습이 우리 시대 많은 아버지들의 실루엣인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 기억 속의 그 아버지가 지금 여러분의 망막에 비쳐지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닌지요?
아버지의 사랑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같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아이들의 사랑도 동서양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뿐입니다. 문화와 역사가 아무리 크다 해도 아버지의 사랑보다 크진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자꾸만 작아져 갑니다. 자본이 인간관계를 잠식해 가는 정도가 이제는 도를 넘었기 때문은 아닐 런지요? 그래서 더욱 더 복원되어야할 소중한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계를 관계로서 지켜가게 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 마음(心)을 다하는 자는 자기의 본성(本性)을 알고, 본성을 아는 것이 곧 하늘을 아는 것이다.《맹자》”
여기에서 그 마음이란 이른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는 사단(四端)을 가리키지요. 위 인용문은 이러한 마음에 충실할 때 자신의 주체성을 깨닫게 되고, 주체적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곧 하늘을 아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늘은 주체를 초월하여 저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며,마음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논리구조로 말한다면 칸트가 걸었던 길, 즉 도덕적 주체를 기초로 그 위에 신학과 형이상학을 세웠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길은 동양의 사상가나 정신적 스승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곧장 가리켜[直旨人心] 본성을 보는 것이 성불하는 것이다. [見性成佛]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깨끗하다고 봅니다. 이 깨끗한 마음이 바로 인간의 본성으로 선천적으로 갖추어 태어나는 것으로, 이른바 여래장자성청정심 (如來藏自性淸淨心)입니다. 여래장이란 태어날 때 그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이고, 자성이란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여 생하는 게 아닌 본래성을 가리키며, 청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뜻이니, 곧 여래장 자성이 청정심이란 의미입니다. 도교에서도 순수한 자연의 덕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요. 도교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숲과 강으로 이루어진 자연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이니, 곧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 그대로라는 의미로 읽히는 것입니다. 결국 동양사상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여 주체를 세우고 주체로부터 출발하여 주체를 완성하는 것으로 마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체를 완성하는 곳에 하늘이 있고 형이상학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정통이고 정신입니다.
이제 이러한 관계를 관계의 그물망, 그 전체론적 사유를 찾아가 봅시다.
여러분들은 여기까지 강의를 들어왔다면 이제는 주체란 무엇이고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오리무중일 겁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는 질문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본성이든 주체성이든 이제는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송나라 때의 주자(朱子)는 그것, 예컨대 ‘인(仁)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원리이며 마음의 덕성 (愛之理心之德)’이라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정작 덕성을 사람들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공자는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도를 행한다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그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 고려대 2007학년도 수시2학기 논술고사
주자의 사유는 사람에게서 너무 멀리 나아갔고, 그렇게 멀어져 간 거리만큼이나 동양사상의 정통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자학의 이런 측면은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에게는 수용되기 힘들었겠지요. 공자는 사람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 바로 마음이 편안하냐 편치 않느냐를 갖고 도덕성(인)을 판단합니다. 즉 도덕성이 무엇이냐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 여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군자의 도에는 네 가지가 있다. 나는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에게 바라는 바로써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하급자에게 바라는 바로써 상급자를 대하지 못하고, 동생에게 바라는 바로써 형을 위하지 못하고, 벗에게 바라는 바로써 먼저 베풀지 못한다. 그러니 평소에 어찌 말과 행동에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성실히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고려대, 위의 글
편안함과 편안치 못함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에서 나옵니다. 만약 돌아가신 분이 나의 부모가 아니라면 쌀밥에 고기를 먹으며 흥겨운 음악을 들어도 마음에 불편함이 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칩니다. 특히 억울한 죽음, 불쌍한 주검 앞에서는 분노와 비애감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슬프기로 친부모의 죽음보다 더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나와 맺고 있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관계망 속에서 마음이 움직이며, 그 마음의 움직임으로 덕성, 즉 도덕적 주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은 인성(人性)의 고양을 최고 가치로 여깁니다. 유교의 성인, 불교의 부처, 도교의 지인이나 진인 등은 모두 인간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실현하였을 때 가능한 경지입니다. 공자나 석가나 노자의 가르침에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 밑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러한 동양적 가치로서 주체적인 인간관계의 근거를 신영복 선생도 말했었지요.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 신영복, 《강의》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나’강미는 아버지의 딸이며 한 계집아이의 어머니이고 한 남자의 정인이며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선생입니다. 서양인들의 사유방식에서 ‘나’는 ‘남’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이지만, 동양적 사유 패러다임에서 ‘나’는 나를 중심으로 촘촘히 맺어져 있는 관계망의 중심입니다. 똑같이 주체를 세우지만 그 구성원리가 다른 것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 신영복, 위의 책
서양이 독립적이며 불변의 고정된 실체관을 바탕으로 자연관에서는 고립된 입자설로, 인간관에서는 합리적 개인주의로 전개되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가졌다면, 동양은 무수히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주체성을 확립해 가는 관계론적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그들 각자의 패러다임 위에 펼쳐놓은 문화와 역사의 차이만큼이나 넓고도 깊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의 부모, 자식간의 관계 더 나아가 나와 너와의 관계는 주체가 누구냐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자연스런 관계로서 받아들이고 책임지게 됩니다.
이제 강의를 맺어 봅시다. 길었지요. 동양적 가치관, 서양적 가치관 어쩌고 하면 일단 여러분에게는 생소하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논술하는 길은 이러한 일상적인 패러다임의 익숙한 틀을 벗어나려는 몸짓의 창의적 사고의 과정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과 나와의 관계가 논술강사와 학생의 관계에서의 기능적인 수행만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아낌 없이 관계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 아버지의 주체적 자각에서 비롯되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논술하는 힘은 이렇게 중심이 무엇인가를 자각하는 순간에 얻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계 제 1의 입시지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체계에서 획일화된 성공이라는 것만을 쫒지 않으면서도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로 세워가는 길을 찾기 바랍니다.
강의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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