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의 우연과 필연은 있는가?
1. '클레오파트라의 코'와 '경국지색'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이것은 역사를 우연한 사건의 집합으로 보거나 우연히 역사에 끼치는 영향을 매우 크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즐겨 하는 가정이다. 이런 예가 유럽의 역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은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총명한 인물이었는데 '달기'라는 여성에게 사로잡힌 뒤로 주색에 빠져 포악한 정치를 폈다고 하고, 당나라 현종은 혼란스러운 나라를 맡아 민생을 안정시키고 질서와 제도를 바로잡은 어진 임금이었는데 양귀비라는 여성을 알고부터 주색에 빠져 정치를 신하들에게 맡김으로써 결국 안녹산의 난을 자초하는 등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제왕의 마음을 빼앗은 여성을 가리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한다. 다시 말해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말이다.
역사에서 필연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애쓰는 역사가들에게는 매우 안 된 일이지만 역사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매우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제1차 세계대전은 가브릴로 프린시프라는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권총으로 사살한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그러나 우연이 역사를 전면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9세기에 전 세계를 남김없이 분할 점령하고도 모자라 한 뼘의 식민지라도 더 차지하려고 서로 으르렁거린 유럽의 제국주의가 아니었다면 하나의 암살 사건으로 세계가 불탔을리는 만무하다.
겉으로 보면 역사는 어디까지나 우연의 집합에 불과하다. 역사에는 언제나 우연한 사건이 끼어드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흐름에는 아무런 방향도 없거니와 역사에서 아무런 필연적인 법칙도 찾을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다.
2. 박종철의 죽음과 6월 민주 항쟁, 우연인가 필연인가
1987년 1월 14일 주요 석간신문 사회면에 한 대학생의 죽음을 알리는 1단짜리 기사가 조그맣게 났다. 내용인즉 "시국 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이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처음 경찰 당국이 설명하기로는 "평소 폐결핵을 앓고 있던 박군이 수사관이 바른대로 말하라면서 책상을 한 번 '탁' 치자 '억'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경찰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났다. 박군의 시신을 제일 먼저 본 의사가 박군의 몸에 여러 군데 피멍이 있었으며 시신이 물에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사체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이 심장 마비가 아니라 물고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광주 민중 항쟁 7주년의 추모 미사를 집전하는 자리에서 박군 고문 살해 사건의 진상을 정부가 조작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의 요지는 박군을 고문한 경관은 둘이 아니라 다섯이며 정부와 권력 고위층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사건을 축소 은폐하였다는 것이었다.
1987년 한국의 정치적 분위기는 폭풍 전야를 방불케 했다. 1979년 12․12 쿠데타, 1980년 광주에서의 대학살을 저지르면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선거인단을 체육관에 모아 놓고 99.99%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전두환 씨 일파의 정치적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도록 하자는 야당의 주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 전두환 씨는 1987년 4월 13일 소위 '호헌 선언'이란 것을 발표하여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하고 또다시 체육관 선거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노라고 선언했다.
재야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인 민주 통일 민중 운동 연합과 야당인 통일 민주당, 종교계 단체들, 노동계 지도자들과 문화 예술인들까지 참여한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는 6월 10일 오후 6시 서울 등 전국 22개 도시에서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를 동시에 개최했다.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6월 29일 갑자기 텔레비젼 앞에 나타나 사태 해결을 위해 자신의 제안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수용, 김대중 씨에 대한 사면 복권과 양심수의 석방, 국민의 기본권과 언론 자유 보장, 지방 자치제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등을 내용으로 한 소위 6․29 선언을 발표한 노씨는 민정당이 자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전두환 씨는 다음날 노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6월 10일 이후 전 세계 언론의 초점으로 떠올랐던 6월 항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국민의 눈과 귀는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 행사로 쏠리게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의 줄거리를 더듬다 보면 몇 가지의 "우발적인 사건"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서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만일 박 군이 죽지 않았더라면", 또는 "처음부터 군대를 투입해서 국민운동 본부의 지도부를 일망타진해 버렸다면". 역사에서 '필연성'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건 사이의 "불가피한 인과 관계'를 의미한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반드시' 다른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앞의 것을 원인이라 하고 뒤의 것을 결과라 하여 둘 사이에 인과 관계를 세운다.
6월 민주 항쟁을 더 차분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사건을 꿰뚫는 인과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경찰관들이 영장도 없이 박군을 강제 연행하여 잔혹한 고문을 한 것은 수배중인 다른 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찾고 있는 수배자의 '죄'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한 것이었다. 그 학생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자를 위해 노동자 농민 등 다수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자기 손으로 민주적인 정부를 세워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싶어 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정부의 고위층은 고문 살인 사건의 진상이 그대로 드러나면 더 많은 국민들이 반정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할까 두려워 사실을 축소 은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발각되자 국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런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수백만의 시민들이 국민운동 본부의 계획에 호응하여 궐기한 이유는 단순한 고문 살인 사건과 은폐 조작이 아니라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 여러 해 동안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생존권을 탄압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비민주적 강권 통치는 반드시 국민의 저항을 초래한다."는 인과 관계를 세울 수 있다.
박종철의 죽음에서 4․13 호헌 선언과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진 1987년의 상황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독재자들이 자진해서 권력을 내놓는 일은 없으며, 민중의 힘이 독재자의 폭력을 능가할 때라야 마지못해 부분적인 양보나마 하게 된다. 만일 그러한 양보마저 거부할 경우 독재 권력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진다."
6월 민주 항쟁의 원인이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억압과 횡포였기 때문에 박종철 군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국민이 궐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6․. 29선언이 아니었다면 전두환 정권은 60년대의 이승만 정권처럼 현경에 의해 전복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국민의 궐기를 6월 민주 항쟁이 아니라 7월이나 8월 민주 항쟁 또는 민주 혁명이라고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필연성이다.
3. 역사에서의 우연과 필연
우리가 역사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모든 사건을 다 필연적인 역사 법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자연 법칙처럼 확고부동한 역사 법칙을 찾아내려 한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우연의 역할을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 했다. 그들은 우연이란 기껏해야 역사적 사건의 전개 과정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을 뿐 그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역사에서 우연한 사건이란 "다른 사건과 필연적 인과 관계를 맺지 않은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의 미모는 다른 역사적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순전히 부모로부터 우연히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거대한 제국의 몰락과 붕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레닌은 불과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러나 레닌이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이후 러시아의 역사가 상당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루이 16세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에다 사냥과 자물쇠 만드는 일에 몰두한 인물이었으며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호화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사치와 방탕으로 날을 지세다 민중의 원성을 샀다. 루이 16세와 앙트와네트가 반드시 그런 인물이어야 했을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타고난 무능과 허영심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파국을 초래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양귀비의 미모, 레닌의 때 이른 죽음, 루이 16세 부부의 무능과 허영심 등이 역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을 구태여 깎아 내리거나 외면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에서의 우연이라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실제로 역사가들이 작업해 가는 과정에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가는 과거의 무수한 사실 가운데서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여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가가 만들어 내는 것은 역사적 사실 그 자체나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사실들 사이의 연속된 인과 관계이다. 역사가는 자기가 관찰한 수많은 사실의 산더미에서 쓸 데 없는 것은 버리고 의미 있는 것만을 골라 합리적인 인과 관계로 이어 준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진 인과 관계의 사슬이 바로 역사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레닌의 죽음, 루이 16세의 무능과 마리 앙트와네트의 허영 따위는 역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실의 연속적인 인과 관계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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