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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강의 27.]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만 잘하면 되는 세상에서...

변산바람꽃 2011. 8. 30. 11:57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대학에 들어갔다느니, 전자오락을 잘하는 학생, 바둑을 잘하는 학생이 들어갔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대중매체를 장식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사실 자체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대학이 순수와 저항의 공간이었던 시대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도처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은 이미 하나의 기업이다. 다만 ‘대학’이라는 이름에 붙어 있는 ‘문화자본’을 교묘하게 이용해먹는 기업일 뿐이다. 장사에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를 합격시키지 못하겠는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한 대중매체의 태도다. 대부분의 대중매체가 이런 현상을 개탄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이제야 시대가 제대로 돌아간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가 왔다는 것일까? 한마디로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세상일까?

어떤 한 가지를 잘한다는 것은 그것에 익숙하고 그 일에 숙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잘하는 세상이란 각자가 자신이 맡은 한 가지 일에만 능숙하고 다른 일에는 서툴거나 더 나아가 무관심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의 극한은 아마도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가 되는 세상일 것이다. 볼트는 볼트 일만 하고, 개스켓은 개스켓 일만 하고, 캠은 캠 일만 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결국 이런 사회는 개개의 인간이 철저하게 기능인이 되는 세상이며, 또 그 누구도 전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는 질서있게 돌아가야 할 것이며,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전체를 조종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란 결국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다른 일에는 ‘걱정하지 않는’ 세상일 테고, 그런 세상이라면 결국 극히 잘 조직화된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란 도대체 어떤 세계일까?

 

그런 세상이란 바로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세상일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삶 자체가 컴퓨터들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사회,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삶 그 자체가 ‘디자인되는’ 사회, 모든 존재들이 매트릭스의 한 부분이 되는 사회, 그 누구도 지금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지금 내 삶의 動因은 무엇일까? 왜 사회는 이렇게 굴러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묻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한 배신자의 말처럼 ‘모르는게 약’이다. 진실을 알면 그때부터 불행해지기 때문이다(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의식화되기’ 시작하는 신입생이 얼마나 큰 마음의 고통을 겪는지 생각해 보라). 인생이란 소수의 권력자들(누구도 그들이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권력자들)에 의해 공연되는 ‘트루먼 쇼’가 아닌가? 오로지 일방향적인 과제들만이 주어진다. “너는 의사니까 병이나 고쳐!” “너는 기술자니까 볼트나 조여!” “너는 철학자니까 칸트나 읽어!” “너는 천문학자니까 망원경이나 열심히 봐!” “꼬맹이들, 너희는 책이나 열심히 읽어!”

 

누구나 한 가지만 잘하는 세상이란 결국 개개의 인간은 부품이 되고 특정한 집단이 전체를 담지하는 초월자로서 군림하는 세상이다. 전통 정치학은 늘 이런 초월자를 규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 초월자가 하늘이든 이데아의 세계를 본 철학자들이든 신이든 말이다. 마키아벨리 이래 정치는 이런 초월자를 벗어던졌지만 ‘계약’의 개념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또다른 초월자를 제시했다. 사람들의 ‘일반의지’는 이제 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된다represented. 이제 사람들의 권리는 그 자체로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를 담지하는 존재에게 복제되어 현존하게re-presented 된다. 누구나 자신의 집에만 관심을 두지 도시 전체에 관심을 두지는 않듯이, 이제 거추장스러운 권리는 누군가에게 이양하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근대 시민’이 탄생한 것이다.

 

근대 사회는 이 근대 시민의 개념을 창출해냄으로써 전통 사회의 질곡으로부터 대다수의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근대 이후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代議대의’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대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근대 정치철학과는 전혀 다른 정치철학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이제 누군가에게 전체를 양도하고 자신은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왜소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전체를 생각하고 스스로 권리/권력을 조직화할self-organize 수 있는, 자립적 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존재를 개념화하는 정치철학을.

 

민중의 일반의지를 담지한다던 ‘정부’는 이제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거대 권력으로 자리잡았다. 정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바로 ‘국가’라는 문화자본이다. 정부의 일은 곧 국가의 일인 것처럼 행사되므로, 거기에 다른 영역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초월적 권리가 부여된다. 대중들은 국가와 정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국가에 얌전하게 양도한다. 오늘날 상황은 또 바뀌었다. 이제 국가는 잔인하게 대중들을 탄압하고 강력한 힘으로서 군림하기보다는, 다양한 ‘서비스’로 대중에게 다가서고 갖가지 ‘사업들’을 통해 대중들과 연계된다. 정부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기업체가 된 것이다. 공공기관과 기업의 구분은 흐려진다. 정부, 대학, 기관 등등은 모두 하나의 기업체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두려운 것은 없다. 유일하게 두려운 것은 이런 상황을 깨닫고 그에 저항하는 ‘문제아들’, ‘위험인물들’, ‘체제전복자들’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또하나의 강력한 동맹군이 붙는다. 바로 대중매체라는 동맹군이다. 대중매체는 저항하는 사람들을 거칠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비뚤어진’ 인간으로 그리며,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린다. 정권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은 결코 카메라에 실리지 않으며, 투쟁 노선을 학내 투쟁으로 선회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꼬박 뉴스에 싣는다. TV는 대중들의 비판의식을 끊임없이 거세시키고 그들의 가치관을 대중들의 뇌리 속에 박아넣는다. 대중매체는 의식을 거세시키는 이마주들을 끝없이 생산해내며 이 이마주들을 가지고서 그들의 권력을 쌓아나간다. 오늘날 정부와 기업조차도 그 위세를 꺾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대중매체는 끝없이 외친다. ‘하나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 왔다고. 돈과 권력이라는 고전적인 힘에 이제 대중매체라는 힘이 다시 가세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이러한 더러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둔 순수의 공간이자, 동시에 그 현실에 맞선 저항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 어디에서 순수와 저항을 찾아볼 수 있는가. 대학은 순수의 공간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흐르는 장이며, 저항의 공간이 아니라 문화자본을 소유한 기업일 뿐이다. 교수들은 학문과 인격을 갖춘 사회의 양심이 아니라 ‘BK21’을 따려고 동분서주하는 직장인들일 뿐이다. 학생들은 학문과 저항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와 대중문화에 열광한다.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그 현상을 “이제 하나만 잘하면 되는 세상이 왔다”고 떠드는 일은 바로 이런 전반적인 배경에서 가능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커다란 신작로에서 남보다 앞서가려고 뛰기보다는, 이제 사회 곳곳에 작은 오솔길들을 내자. 소모적인 경쟁에서 창조적 오솔길로. 오솔길은 게릴라戰의 기본이다. 사회는 정부, 재벌, 대중매체, 대학, 각종 기관 등 거대한 신작로의 체계로 되어 있다. 그 신작로 체계에 들어간 사람은 결국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조직의 부품이 될 뿐이다. 다만 더 비싼 부품이 되려고 발버둥칠 뿐.

 

그러나 이제 무수히 난 오솔길들이 거대한 네트워크, 그러나 변증법적 하나로 통일된 네트워크가 아니라 여백과 탈구를 매개로 한 리좀을 형성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저항세력의 결집이 가능하다. 대중들에게 ‘의식’을 심어주는 각종 재야 강의실, 거대한 정권과 맞서 투쟁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고독한 戰士들, 전문가로서 각자의 영역을 개혁하려고 애쓰는 지식인들…. 작지만 넓게 퍼져 있는 이 게릴라들이 사안에 따라 역동적으로 연대를 이루고 또 해체되는 길항 작용이 21세기의 운동을 주도할 것이다.

 

한 사회의 건강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대중이 결정한다.

독재자도 민주투사도 역사를 궁극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역사의 마지막 劇場은 대중들에게 있다. 오늘날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한 가지만 잘하면 되는’ 사회에서 권력과 자본주의, 대중매체에 의해 식민화된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세계 전체를, 삶 전체를 보는 눈을 주는 것이다.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 촉촉한 정서를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각종 인문적 교양, 그리고 우주와 역사 전체에 대한 철학적 비전을 갖춘 그런 인간, 정말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그런 인간. 대중 전체가 그런 인간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무상급식과 관련된 주민투표로 야기된 서울시장의 사퇴...곽노현 교육감의 사태로 나라 전체가

정체성 부재로 마치 죽 끓듯 들썩거리고 있다. 이럴 때 교육..그리고 대학...그리고 지성인과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그리고 여론의 올바른 방향을 이끌기 위한 우리 시대 대중들과의 올바른 소통을 고민하며... 오늘 여러분에게 나는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욕망을 욕구하지는 말라는 조언으로 강의를 맺는다. 지금 시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여러분...

 

(강미/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