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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강의 39.] 너는 누구인가?

변산바람꽃 2011. 12. 29. 22:09

 

 

[논술강의 39.]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하게 될 상황에서 ‘너는 누구인가’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시도하게 된다. 아마 여러분들도 새 학기로 바뀔 때 마다 함께 진급하는 친구들 외에 새로 만나게 되는 친구들에 대해 그렇게 관계 맺기를 위한 접근을 먼저 시도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는가? 여러분이 상대를 알기 위해 ‘너는 누구인가’를 찾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아 확인이 우선 되어야 상대를 나와 마주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을 우리는 여러분의 정체성 확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할 때 우리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나’에 대한 수많은 관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은 단지 자신의 정체(여성, 논술강사, 시인, 에세이스트, 스토리텔러, 장녀, 딸의 엄마 등)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와도 관련된다. 즉, 정체성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기 관념’이자, 동시에 우리를 사회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스스로 ‘여성’이라는 자기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사회를 살아가면서 여성으로서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규정된다. 그러므로 정체성이란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정체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위한 예비 단계로, 먼저 정체성을 개별성, 다양성, 동일성이라는 세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개별성’은 세계 속에 ‘나’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나의 ‘유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속에서 ‘나’와 동일한 존재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법적 권리를 규정하고 행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나를 유전적으로 복제한 존재와 나의 관계는 정체성의 ‘개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를 각각 독립적 인격으로 대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유전자 복제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신분확인의 문제일 뿐, 개별성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물리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개별성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물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두 사람은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같은 좌표에 존재할 수 없다. 즉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별성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타인과 구별되는 ‘몸’을 가지고 물리적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일차적으로 ‘몸’의 개별성 때문에 가능하다. 엄마와 자신이 서로 분리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는 영원히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정신 분석학에서는 이를 ‘상상적 동일시’라고 부른다).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나와 구별되는 너의 존재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물학적 개별성의 문제로 정체성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자극을 받아들이는 신경계와 그 자극을 처리하는 뇌의 개별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당신의 뇌와 똑같은 구조의 뇌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는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존재는 세상에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유일한 존재가 된다.

 

 

정체성의 두 번째 층위인 ‘다양성’은 인간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럿이다. 예를 들어, 여자, 한국인, 장녀, 논술강사, 시인 등이 모두 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양한 역할(역할 정체성)과 집단의 구성원(사회 정체성)으로서 자신을 ‘동일시’해가는 과정인 셈이다.

 

 

한편, 각각의 정체성은 다층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 남성의 경우,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나(가부장적 남성 정체성), 직장에서는 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백인 우월주의적 민족/인종 정체성), 반대로 흑인들을 멸시할 수도 있다(차별적 인종 정체성). 이처럼 우리가 다양한 정체성을 수행하며, 어떤 정체성은 상황에 따라서 두드러질 수 있다.

 

 

먼저 살펴 본 정체성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지탱해 주는 토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정체성은 다시 자아 정체성, 역할 정체성, 사회 정체성, 문화 정체성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다루는 상징적 상호작용론을 정체성 문제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대부분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상황에서는, ‘Me’와 ‘me’가 습관적·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에 따르면, 사람은 언어와 문자 등 상징을 사용하여 서로 상호 작용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한다.

상징적 상호작용론은 개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주어진 상황을 정의하며 이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인지하고 평가하느냐는 ‘상황 정의(definition of situation)’이다. -금성 출판사, 고등학교 사회]

 

 

인간은 스스로를 객체화 혹은 타자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 반성을 할 때, 나는 둘로 분열된다. 하나는 관찰하는 나(객체화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당하는 나(객체화된 나)이다. 정체성이 ‘주체의 자기관념’이라면, 이때의 자기관념이란 ‘I’가 ‘me’에 대해서 가지는 관념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은 ‘me’에 대한 ‘연속적인 관념’을 갖고 있는 ‘I’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러한 관념이 가능한 것은 ‘기억’ 때문이다. 이는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면 이해하기 쉽다.

 

 

주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I’와 ‘me’의 상징적 상호작용을 ‘I↔me’라고 표현하고, ‘내적 상호작용(internal interaction)’이라 하자. 과거의 내적 상호작용이 현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 내적 상호작용은 언제나 누적된 기존의 내적 상호작용들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즉, ‘n번’ 째 내적 상호작용은 ‘n+1번’ 째 내적 상호작용에 연결되고 통합된다. 그러므로 정체성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누적된 ‘I↔me’를 토대로 하여, 내(I)가 나(me)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 내가 나에게 부여한 속성,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 등을 통해 형성되는 관념들의 총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들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누적되고 뇌 속에 보존되기 때문에, 자아의 동일성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I’가 무엇을 근거로 ‘me’를 판단하고, 속성을 부여하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외적 상호작용(external interaction)’에서 찾을 수 있다. 외적 상호작용은 나(I)와 타자(other)의 관계라는 점에서 ‘I⇔O’라고 표현하도록 하자.

 

외적 상호작용에서 ‘I’는 내적 상호작용에서 ‘me’를 대했던 것처럼 ‘O’를 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I’와 ‘O’사이에는 ‘I’와 ‘me’사이에서와 같은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타인을 띄엄띄엄 만난다!).

 

달리 표현하면, ‘타자의 내적 상호작용(O{I↔me})’을 알 수 없기 때문에 ‘I’는 ‘O’가 될 수 없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거꾸로 말해, 만약 ‘I’가 ‘O{I↔me}’를 알 수 있다면 ‘I⇔O’는 곧 ‘I↔me’가 될 것이다. 즉, 나는 네가 된다(‘I=O’).

 

 

‘I’와 ‘O’가 개별적인 두 주체라고 할 때, ‘I⇔O’에서 ‘O’는 ‘I’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Me’라고 표현하자. 그런데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I’ 역시 ‘Me’에 대한 관념을 가져야 한다. 즉, ‘Me’는 간주관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는 ‘me’가 지니는 독립주관적 특성과는 상반된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의 상황에서 나(I)는 ‘Me’의 속성에 근거하여, ‘me’에게 특정한 속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Me’에 대한 ‘I’의 반응이 ‘me’로 표상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드(Mead)의 지적처럼, ‘자아는 자신의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의해서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 말은 ‘Me’에 대한 ‘I’의 반응이 곧 ‘me’을 ‘Me’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즉, ‘I’는 불확정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사회적이고 관습적으로 규정되는 ‘Me’를 초월한 ‘me’를 지향하려는 욕망을 갖는다(이 욕망의 근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은 외적 상호작용에서 ‘O’가 ‘I’에게 기대하는 ‘Me’에 의해서 규정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Me’를 초월하려는 ‘I’의 특성 때문에, 비고정적인 속성을 지니게 된다.

 

 

간단히 말해, 정체성은 ‘I’가 ‘me’에 대해서 갖게 되는 관념의 총체이고, 이 때 ‘me’에게 부여되는 속성들은 외적 상호작용에서 규정되는 ‘Me’를 참조하지만 결코 그것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범생 아들의 경우에는 ‘I’가 ‘Me’에 부응하는 ‘me’로 반응하는 사례인 반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딴따라’의 길을 걷는 아들의 경우은 ‘Me’를 초월한 ‘me’를 실현하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정체성들에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만은 아니다. 상호작용의 상황에서 '자신에게 규정된'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규정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는 ‘Me’와 ‘me’의 관계를 조정하는 ‘I’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고부간의 갈등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성을 상상해 보자. 아내는 그에게 자기 편이 돼 달라고 부탁한다. 즉, 남편으로서의 정체성을 수행해주길 바란다. 이때, 남편이라는 정체성은 ‘Me’에 해당할 것이다(I{Me}). 그러나 어려서부터 마마보이 소리를 들었던 이 남성은 남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이때,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me’에 해당할 것이다(I{me}). 이제 이 남성은 아내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남편-정체성’과 스스로 수행하고 싶어하는 ‘아들-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율해야 한다. 한편, ‘아들-정체성’을 수행하고 싶어하는 남편 역시 자신의 아내가 순종적인 며느리가 되어 주길 바랄 것이다. 이때, 순종적 며느리라는 정체성은 ‘Me’에 해당한다(O{Me}).

 

반면, 아내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며느리가 되고 싶어한다(O{me}). 결국 이 부부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바라는 바와 스스로 되고자 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 자체를 끝내거나(이혼), 어느 한 쪽이 양보를 해야만 한다. 즉, 아들(I{me})과 순종적 며느리(O{Me})로 타협을 보거나, 남편(I{Me})과 자율적 며느리(O{me})로 타협을 봐야 한다.

 

물론 위와 같은 설명은 이자(二者) 관계만을 다룬다는 한계를 지닌다. 만약, 위의 도식에 시어머니가 끼어든다면, 설명은 매우 복잡해질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체성 문제는 항상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상호작용은 어디서 진행되는가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강의가 진행 중인 교실과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만 남아있는 교실은 물리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공간이 된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에 상이한 정체성을 수행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정체성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특정한 정체성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이동해 가면서 다양한 상호작용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어떠한 상황들은 매우 짧은 시간에 종료되기도 하고(버스를 탈 때 교통카드를 제시하는 행위처럼), 어떤 상황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학생 주임 선생님을 보면 자동적으로 피하는 학생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상황에서는, ‘Me’와 ‘me’가 습관적·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자...여러분은 누구인가를 알고 싶은가? 여러분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라. 너는 누군인가를 설명하는 대답에서 여러분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의를 마친다. (강미/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