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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야기] 시인 고정희, 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다.

변산바람꽃 2014. 12. 18. 05:19





詩 이야기] 시인 고정희, 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다.




 들어가며...


고정희 시인은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상’을 탔다. 시세계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무렵인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다.

 

고정희는 시를 쓰는 한편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을 했고,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 문학사에서 고정희 이전에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성' 그리고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고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사에 페미니즘이라는 중요한 인식의 장은 훨씬 더 늦게 열렸을 것이다.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10권의 시집을 발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놀랄 만한 다산성 시인이면서도 결코 어느 하나 함부로 창작해 내지는 않았다고 평가된다. 오직 '시를 쓰기 위해서 살았던'것 같은 그에게 시는 존재의 결과이자 이유였다. 그렇다고 하여 수없이 생명을 생산해 내듯이 시로 긴 노래를 그렇게 목 놓아 부르며 죽음의 강을 건너가야 했던 것일까.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봄비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이야기 하나...


고정희 시인이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한신대학은 학생운동이 아주 활발하게 전개되던 학교였다. 그 생애의 치열함에는 수유리 종교의식과 광주의 역사의식, 그리고 여성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거나 묵상에 잠기는 생활을 했던 그는 분명 시를 통해 구원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한신대는 당시만 하더라도 수유리에 있었다. 물론 지금도 신학대학원 같은 건물은 그곳에 있지만, 종합대학 한신대는 현재 수원과 화성, 오산의 중간쯤으로 옮겼다. 필자는 수유리 시절의 한신대 위에 있던 화계사 입구의 수유여중을 다니고 있던 터라 토요일 오후이면 한신대 잔디밭에서 해바라기를 하거나 한신대 뒷산에 있는 성에 올라가는 것을 즐기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나서, 고정희 시인은 민족문학 작가회의에서 앞장서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여성신문사에서 초대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고시인은 대학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만, 김준태, 장효문, 송수권, 국효문 등과 ‘목요회’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문화운동 동인‘또 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 하였다.

 

지금 읽어보면 고정희 시인의 시는 조용하게 읽어도 힘이 차오름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오랜 동안의 신앙의 힘과 어머니, 지리산과 같은 존재들이 시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남군 삼산면 그의 생가는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과 손때 묻은 책들을 그대로 보존한 방을 보관하고 있다. 그 곳을 찾아간 사람들은 그의 생전의 지향점과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의 묘소는 고향집 뒷동산에 늘 정갈하고 푸르게 관리되어 있다.

 

그는 성실한 시인이었다. 최초의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1979)를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시집이 10권정도 되는데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사이에 꾸준히 한권씩 시집을 출간하였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와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시인상을 수상한 [초혼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죽음에 대해 다른 결론을 내리는 기독교, 유교, 불교와 무속신앙에서의 조우를 기독교인이면서 합일하고자 했던 고정희의 장시집(長詩集)은 그의 실험적 생애의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고정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야기 둘...


해남에서 태어나 70년대말 광주 YWCA간사로 일한 적 있는 그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이었고, 그래서 광주의 고통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눈물꽃]에서 가장 처벌한 세계인식이 드러난 시는 <프라하의 봄.8>시편들이다. 산발하고 눈물 핏물 뒤집어 쓴 채 젖가슴 도려낸 흉악한 꼴로 두 눈에 쌍불켜고 오는 '미친년'이 바로 5월의 원혼이다. 처참하게 죽어 구천을 헤매는 영령들은 '하나님께 삿대질하며, 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미친 짓을 하는데 이것은 바로 절망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요 절규이다.

 


   예수 전상서

                         -고정희-

요즘은 정 두터운 사람과 만나도

말문 트기 바쁘게 아픔이 먼저 온다.

마주보기 무섭게 슬픔이 먼저 온다.

호의보다 편견이 앞서 가리고

여유보다 주검이 먼저 보인다.

스스로 짓눌려 돌아올 때면

친구여

서너 달 푹 아프고 싶구나.

그대도 나도 불온한 땅의

불온한 환자임을 자처하는 요즘은

통화가 끝나기 전 결론을 내리고

마주치기 앞서서 셔터를 내린다.

좋은 물건일수록

의심을 많이 한다

서너 달 푹 아프고 싶구나.


새 시대 주기도문

                            -고정희-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 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 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가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가 된 것 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복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

   



  독신자


                       - 고정희-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이야기 셋...


해남 가는 길에 동행했던 벗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자기 삶을 정리하는 시를 남겼다. 시인은 1991년 6월 9일 즐겨 찾던 지리산에서 좋지 않은 일기 속에서 감행한 산행 도중 실족사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광주기독병원에서 치루어졌다.

 

중년의 문턱에서 마감한 짧은 생애동안 현실과 여성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자신을 부단하게 채찍질하던 여성 시인 고정희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고정희는 역사를 믿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고정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며 현실 속에 뛰어든 시인이다. 고정희는 그가 믿는 기독교까지도 이러한 역사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없다고 믿는 ‘역사주의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엔 항상 미래를 향한 희망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엔 역사를 살리고 인간을 살려내려는 생명력이 가득하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시엔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역사 속의 인간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교훈적 선동성도 가득하다. 더 나아가 그의 시엔 왜곡된 역사, 파행적인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정의감이 가득하다.

 

이런 고정희의 내면세계와 행동 그리고 그의 시를 통하여 분출되는 강한 의지력을 읽고 있노라면, 역사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현장 속의 진행형 동사임을 절감하게 된다.

 

고정희, 그는 평생을 젊게 산 시인이다. 그가 쓴 시의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그리고 그가 살아온 생애의 어느 시간을 보더라도 그는 청년처럼 싱싱하고 건강하였다. 그는 진행형 동사의 형태를 띤 역사의 중심부 혹은 최전선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였고, 그 위치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정의의 역사를 만들어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정리/ 강미)



-참고-


이승하/ '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 새미, 1999.

윤대손/ '고정희 시에 나타난 공간이미지 연구'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