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미의 문학서재 §/◎ 강미의 斷想

페이스북에서 / '승속이 다릅니까?' 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의 비교...

변산바람꽃 2011. 3. 30. 01:35

 

승속이 다릅니까?

 

승가라고 하는 불교의 화합대중에서 특히 출가 수행승에 있어서 비구와 비구니를 가르거나, 누가 관리를 맡고, 누가 수행만하는 것이 그렇게 왜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불법승 3보에서 출가스님은 재가불자에 대해서 평생 스승에 해당하고, 재가불자는 각계각층의 사회로부터 입학하고 배우고 졸업하여 떠나가는 학생에 해당한다고 본다.

재가불자는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출가한 출가스님이 3보(불법승)의 보전과 스님생활(자기수행, 재가교육, 중생제도, 중생복락기원 등)을 잘 해낼 수 있도록 하고, 그 가운데에서 그곳으로부터 불교를 청법하여 배워서 깨달아 얻어 사회적으로 구체화하고 실현함과 동시에, 그에 대해서 응당 3보를 유지 보수 발전하는 곳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주인은 3보의 출가승(성직자)이고, 재가인은 그곳을 거쳐가는 학생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인류의  바람직한 비젼의 보존과 민주시민의 자질향상과 사회적 정화기능 등의 다의적 효용성에 대해서 불교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것을 재가불자나 정부에서 지원과 보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승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이 있고, 이판승은 중생교화를 전담하고, 사판승은 절살림을 꾸리는 임무를 맡아서 수행과 함께 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세속의 재가인들은 출가승보다 더 자유롭다. 출가승은 승단의 울법에 공개적으로 온 생을 던져 놓은 상태이다.

이것은 공공연하게 직분을 맡고 있는 공무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조직과의 대비 같은 것으로서 공무원은 잘못을 하면 당장 비판과 처벌을 할 수 있지만, 정체를  숨기고 물밑으로 활동하는 사조직은 그렇게 할 수없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모든 절살림은 이판과 사판에 맡기는 것이 보다 더 투명할 수 있고, 감시하기도 좋다는 생각이다.

다만 재가불자는 우선적으로 기독교의 11조헌금에 너무 미치지 못하여 부족한 불교계의 재정지원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 그것의 사업예산책정이나 회계감사업무 정도에는 참여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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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포커스/정법정론/한국불교의 중요한 문제 - 출재가의 괴리/윤승용)의 글에 대하여

 

 

-글-

 

 

 

 박연범

일반적으로 어느 사회에서든 출가 수행자는 고금을 막론하고 존경을 받아 왔었습니다.  다만 종교적분쟁이

 있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종교의 수행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또는 죽임까지 당했었습니

다만 ...사실 스님이 신도보다 높고 귀하다는 것은 옳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류사회에서의 정신적 계층에

있어서 윤리적 종교의 성직자의 계층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출가수행자는 일신상의 영달이나 잡다한 욕망은 버리고 삶...의 근본적 진리를 구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구하는 바의 진리를 오직 나누어주기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진선미성이라는 규범 가운데에서 성스러울 성(聖)이라고 하는데, 이 길에 들어서면 일반인들의

높고 낮음과는 전혀 다른 방면에서 높고 귀한 신분이 된다고 봅니다.
성직자는 요즈음 출가하지 않은 일부 종교의 성직자가 그 이미지를 많이 훼손한 것 같지만, 일반인들은 남녀

스님이나 신부님 수녀님 같은 출가수행자로서의 성직자분들은 오직 일반인을 이익하기 위해서 삶을 산다는

것을 믿고, 그 분들들을 존경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근수
성직자가 신도보다 인품이나 신심에서 높아야 마땅하오나...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으니... 우리가 우울한거죠..

 

 

정효종

남방불교의 경우처럼 승가는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고....재가불자는 오롯히 승가를 위해 뒷받침하는 풍토가

우리나라엔 약합니다...소위 큰스님이라 하는 분들께만 올인하는 재가풍토...이제 막 시작하는 승려의 교육과

후원을 전담하는 제도가 없이...수행을 거론하는것은 말뿐인 허물이겠지요...당장 근수님의 경우 수행하는

선방이나 율원 강원스님들에 대한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후원에 대해 얼마나 투자를 하셨는지요...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불사는 "나 아니라도 누가 하겠지" 란 생각을 재가불자의 대부분이 그런 생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변화는 승속을 떠나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견입니다...

신심의 정도가 높고 낮다는 상을 떠나....자신으로부터 신심을 돋구면서 수행을 오롯히 해 나가는 스님을

봉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지요...나의 신심이 높을때 수행이력이 존경받을 알려지지 않은 스님네가 눈에

눈에 띈다는겁니다....
보시행을 행함에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눈에 그저 사회적지위로 주목받는 스님들만 눈에

보이는거지요...아직도 전국의 선원이나 율원 강원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주인공을 찾아 공부하는 스님들이

있기에 한국불교..세계속의 불교가 주목받고 있음을 간과 해선 안됩니다...

 

 

Kyung Hee Kim

승가란 비구, 비구니 ,재가신도,불교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불법승 3보 귀의에서 부처님께 귀의 , 법문에 귀의 ,
승가에 귀의를 "스님들께 귀의"로 잘못 해석하고있다. 불교계에서 고쳐야할 문제가 또하나 스님들 스스로

자신들을  "00스님"이라 칭하는 잘못. 타인이 부를때 스님 하는 것이지 본인은 "00 승 '으로 표기하고 스스로도

 "00승 '으로 말해야 옳다. 펫북에 00스님님 으로 표기되는 웃지못할 표기가 한번 더 생각해보게한다.

 

 

 
백도영
 불교의 주인이 출가승려고 재가는 학생이며 3보(승려)를 유지보수발전을 위해 재가는 경제적지원를 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효종
흔히 스님들간이나 삼자간에 스님ᆢ여기서 스님이란 고유명사로 이해바랍니다자자기자신을 일러 스님이란

말을 하는 경우는 드문일입니다.

다만 집단을 일컬어 말하는 경우가 많지요. 대개 법명만 말합니다 ᆢ고유명사로서 ᆢ얼숲의 상화스님 처럼
표기한 예는 고유명사로서 표현한 예가 되겠지요 ᆢ중 이란 말은 예로부터 쓰여온 언어이긴 하지만 조선

시대 이후  비하개념의 성격이 다분하고 현재 사회에서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음을 간과해선안됩니다.

본인의 입으로 말함은 상대에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는 경우에 속하기도 하지요. 어찌 불자의 입장에서

스님네의 호칭에 문제 삼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신중히 거론해 주섰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백도영
승단을 칼야나미트라 즉 좋은벗들이라고 인식한 석존은 승단이 곧 본인 가르침 전부며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과거의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열심이 수행하고 법답게 실천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정효종
백도영님의 경제적지원에 대해 ᆢ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란ᆢ옛큰스님의 말씀도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와

같은 경제사회속에서 경제활동을 통해 의ᆞ식ᆞ주를 해결하려면 여러가지 문제가 표출 됩니다 근래 불자들을

상대로 생수판매를하니 스님들이 물장사한다한다고 논의가 제기되기도 한예ᆞ동아시아불교에선 문화적인

차이로 탁발이 어려워 사찰에서 의식을 해결사는데요 신도들의 경제적지원 없이는 해결이 어려운 현실입니다.

이건 단순히 경졔적인 지원문제를 떠난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기에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않고선 올바른

시야를 가지기 힘든 문제입니다. 부디 수행중심의 불교에 대해 섭렵 내지 기초적인 교리를 보신후에 다시

논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기지피면 백전백승이나 적을알고 나를알라 라는 말처럼 호사가들처럼 하기좋은

말이라 논의하지 마시고 최소의 교리를 보신후에 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중요한거은 법답게 수행하는거이지요. 줄재가를 아울러 승가의일원으로써 무엇이 법답게

수행하는것일까요...분별심 내지 않고 한곳에 지우치지 않고 중도를 행하라...
저는 오늘 분별심으로 이 논의의 중심어에 서고 말았네요...참회합니다... 좋은밤  행복하시길...

 

 

Kang Mi (강미)

저는 불자가 아니라 오직 세상(세속 혹은 사회)의 억울함을 줄이고 상하 없이 고루 분배되는 삶을 지향하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라는 인식을 배우기 위해 불교를 철학적. 인식적 이론으로 접근했었습니다.

그 배움으로만 글을 올리자면...백동영님의 논리에는 可/不가 지나치게 드러나 보입니다.

 불교가 우리 민족의 문화에 처음 도래되었을 때는 민중 속으로라기 보다는 지배계층에 먼저 전파되면서

지배계층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변화를 당시 사회에 가져오게 되지요...붓다가 꿈꾸던 방식은 아니었으나

대개의 종교가 상대적으로 당대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듯이 우리 문화 속에서 불교는 처음부터 민중적이지

않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교의 과정에서 쌀 한 톨의 보시와 쌀 한가마니의 보시에 차별이 없었던

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극락정토로의 길은 평등한 길이었음을 대중(민중 포함)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포교를 위한 방법으로 탁발이 이루어졌겠으나 탁발은 또한 불자와 불제자(僧)사이의 교감과 일상의 유지에

대한 서로에 대한 의존과 공감이었지 싶습니다. 물 한 대접의 탁발에도 부처의 마음을 담았다는 것은 탁발을

수행의 수단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으로 인식했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그 탁발의 방법이 문화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각 사찰에서 대부분 개신교와 가톨릭교 기타 종교 마냥 살림살이의 주요한 역할은 대중 중에서 선별한 직책을

가진 이가 맡게 된 것도 공생을 위한 현대적 탁발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게서 올바르지 못한 결과가 없지 않습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은행 직원이 모교회에 파견되어

헌금을 수거해 가는 현상에서 헌금으로 대표되는 살림살이의 목적이 상실되고 있으니까요...사찰이라고 어찌

그런 옳지 않은 모습이 없다고 하겠습니까만 사찰의 특성상 불제자(僧)들의 수행이 선에 있기 때문에 덜 한

편이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탁발로서 사찰의 살림을 위한 경제적 자원은 불자들의 자기 수행을

위한 바램이면 보시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관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신의 보시를 통해 불제자의 안녕을

도울 수 있고 공덕을 나누는 선한 기능도 있지 않겠습니까...

 

불자도 아닌 사람이 아는 척 해서 흉이 될텐데요 또한 백도영님을 지적하여 설명해서 죄송하지만요 이번

댓글을 통해서 제 스스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올린 글이니 미워하지 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