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수많은 시지프들을 보다. ]
늘 내가 사는 일에 급급하여 마음만 겹쳐 놓은 사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아픔의 다양한 현장에 가끔 몸으로 떼우듯이 끄트머리에 슬쩍 다녀오곤 할 뿐..오늘 오후 늦은 시간에 철회된 약속의 빈 시간이라는 핑게로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철회를 위한 촛불집회에 간신히 참가하고 왔다.
이제는 무슨 무슨 역할이나 입장으로 어떤 집회에 참석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은 내게는 아무 무게도 의미도 두지 않은 지 오래 되었기에 그저 수많은 촛불 인파의 끄트머리에서 내 목소리로 외치고, 듣고, 먹먹해가면서도 끄트머리에서 흐름이 작은 점처럼 있다가 돌아오게 된다.
이제 이 정권의 끝이 마치 예정된 길을 들어선 발악을 보고 있느니 만큼 희망은 더 간절하게 기다릴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갑갑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그 바위를 비록 깨트리지는 못하더라도 전체를 계란의 흔적으로 덮을 수는 있을 것이자만 이 또한 소낙비 한 번으로 지워질 것이고..다시 계란을 던지는 노력이 반복되고, 다시 소낙비 한 번에 지워질 것..
그럼에도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생각이 머문 인물...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이다. 거대한 바위를 산정까지 굴려 올리는 무용한 노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게 신들이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이었다는데... 신화 속 인물인 시지프에게 시선을 멈추고 들여다 보았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에서 카뮈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시지프의 한없이 반복되는 노동이 아니었다.
카뮈의 관심을 끄는 건 정상에서 굴러떨어진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기 위해 터벅터벅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이다. 잠시 동안의 휴식은 시지프에게 ‘의식의 시간’이다. 무얼 의식하는가. 자신의 노동과 그 결과 사이의 부조리이다. 이 부조리를 의식하되 긍정하고 다시금 바위에 몸을 밀착하는 것이 시지프의 반항이다.
그러니 카뮈가 들여다 본 시지프에게서 받은 감동은 시지프의 노동 자체가 아니라 그 무용성에 대한 의식이다. 바로 그럴 때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라고 카뮈는 적고 있다.
오늘 나는 광화문에서 비록 이 악의적인 정권과 분열된 국민 정서 사이에서 확장된 부조리의 결과... 삭발까지 하고 찬 바닥에 비닐에 몸을 누이면서까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으로 삶과 유리되어 버린 어린 자식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있는 유가족들의 몸짓과 목소리에서 부조리를 의식하되 현실로서 긍정하고 바위에 몸을 밀착시키며 마침내는 신들의 산 정상에 바위를 세우는 시지프의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한 의식을 보았다.
자식의 영정을 안고 일년이 되어가는 긴 싸움을 놓지 않고 있는 유가족, 부모님들의 그 의식은 분명 이 정권의 완악함보다, 이 정치권의 정책과 대안없음인 무관심보다, 이 국민들 중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부의 무관심과 방관보다, 무엇보다 온갖 수치심을 유발하는 천박한 비난 보다 강하다. 더 강하다.
그러니까 도저히 끌고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지라는, 세월호가 왜 침몰해야 했는가와 왜 구조하지 않았는가와 왜 방치하고 있는가라는 바위를 대한민국이라는 우리들의 국가 맨 꼭대기에 마침내 환하게 밝히는 깃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의 끄트머리에서 갑갑함 너머로 내가 본 것은 그 희망에의 산을 향한 수많은 시지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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